지난 토요일, 친구 우주인
(물론 별명)의 초대로 피아노 연주회를 보고 왔다. ♡
침대위에서 뒹구르르 구르며 이불을 둘러쓰고(?) 책과 책과 책들에 둘러싸여 행복해하고 있는데 불쑥 걸려온 전화, 백만년만의 걸려온 우주인으로부터의 통신이었다. (라는 건 좀 오버고, 하여간 오랜만의 전화이긴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피아노 연주회 공연 표가 있는데 시간 있으면 같이 가지 않으련?. 하는 거다. 후후, 나야 공연이라면 환영이지. 무엇보다 작년 12월 이후로 간간히 전화나 문자, 싸이 방명록으로나 안부를 주고 받았을 뿐, 거의 연락두절 상태라 친구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OK했다.
공연 시작은 5시.
그러나 우주인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만나기를 5시 13분에 만났다. ㅠㅠ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결국, 첫 연주는 놓치고 두 번째 연주 시작하기 전 5분 정도의 휴식 시간에 입장했는데, 그나마 두 번째 연주곡인 <월광>을 들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공연 제목은
"피아니스트 김정원 전국 투어 리사이틀"연주회의 프로그램은,
Debussy (1862~1918)「Suite Bergamasque」 드뷔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Beethoven(1770~ 1827) 「Moonlight Sonata」 베토벤 「월광 소나타」
Musorgsky (1839~1881) 「Pictures at an Exhibition」 무소르그스키「전람회의 그림」
이렇게 총 3곡.
한 곡당 20분에서 40분 사이다.
첫 번째 곡은 아쉽게도 못 들었지만 나머지 곡들에 대한 감상을 짧게 끄적여보자면,
보시겠습니까?
베토벤 「월광 소나타」
: 우어, 이 곡을 이렇게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다니. 그 사실 자체만으로 감동이다.
네이버 검색에 따르면 "월광소나타는 베토벤의 피아노 제자이자 흠모의 대상이었던 백작의 딸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헌정한 곡으로 신분의 차이 때문에 베토벤은 사랑의 결실을 거두지 못했지만 사랑은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이 곡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비장하게 그러나 조금은 쓸쓸하게 시작하는 1악장을 지나 한결 부드럽고 달콤한 2악장,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3악장에 이르기까지 폭풍 같은 감정의 흐름이 느껴지는 곡이다. 어릴 때 잠깐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시절, 이 곡이 너무 좋아서 틈만 나면 피아노 선생님께 이 곡 쳐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있다. (이 곡과 더불어 '가브리엘 포레의 파반느'도 무척 좋아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매우 성가신 표정을 지으셨지만, 가끔 기분 내키면 '월광'과 '파반느'를 차분하게 쳐주시곤 했다. 이번 공연은 어릴 때 들었던 그 감동이 훨씬 풍성하고 현실감 있게 부푸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내가 정말로 달빛 아래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감정의 소용돌이에 점점 휘말려가는 듯한 착각.
1악장은 차분하다. 비통하고 안타깝게 흐르지만 그러면서도 힘이 있다. 그래서 연주자의 표정은 애잔하고 유연하지만, 긴장감 도는 곡의 분위기에 따라 절도가 느껴진다. 2악장은 부드럽다. 연주자의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며 표정과 몸의 움직임도 나긋나긋하다. 그리고 마지막 3악장은 주체할 수 없는 폭발력이 온 몸으로 발산된다. 표정이며 전신이 강하게 움직인다. 의자 위에서 몇 번이나 들썩이는 몸짓하며, 쉼 없이 밟는 페달, 건반 위를 휘젓는 섬세한 손가락들. 소리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氣)가 공연장 전체를 유영하며 관객 하나하나를 뜨겁게 달구는 것 같았다. 무릎위에 가만히 올려놓은 내 손이 멜로디에 맞춰 저절로 까딱까딱 움직여지는 게 느껴졌고 귓 속이 꽉 채워지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렇게 격정적인 3악장이 끝나는 순간, 숨이 찼다. 우와, 하는 감탄과 함께 터져나오는 박수 소리. 연주자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들어갔고, 그치지 않는 박수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나와 인사를 한 뒤에야 2번 째 연주가 완전히 끝났다. 아, 이런 느낌이라니. 첫 번째 연주도 들었다면 좋았을 걸.
월광이 끝나고 나서 15분간의 인터미션이 주어졌다. 첫 번째 연주와 두 번째 연주 사이의 짧은 휴식시간에 입장한 우리는 지정 자리까지 가지를 못해서 대충 빈 자리에 앉았었는데, 옆 자리에 앉은 꼬맹이가 풀썩거리는 바람에 3악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용한 1, 2악장에서는 사실 신경이 좀 쓰였었다. 친구와 난 인터미션을 이용해, 재빨리 원래의 우리 자리로 이동. 꼬맹이를 벗어났다며 좋아했고, 옮긴 자리가 손가락이 좀 더 잘 보이는 매우 명당자리라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리고 잠깐의 수다를 떨며 몸을 이완시키는 사이 15분의 시간이 끝나고 대망의 세 번째 연주가 시작되었다.
무소르그스키「전람회의 그림」
이 작품은 무소르그스키가 그의 절친한 친구 빅토르 하르트만이 젊은 나이에 떠난 뒤 그를 아끼던 사람들에 의해 열린 유작 전시회에 가서 전시된 작품들에게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쓴 일종의 '우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그림, 한 그림 걸음을 옮겨가며 감상하는 순서대로 음악으로 나타내었으며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추천 감상곡으로 실릴 정도로 대중적이고 인기있는 명곡이다. (역시 네이버 검색)
솔직히 고백하면 잘 모르는 곡이었다. 1곡을 듣자마자 '앗, 들어봤던 곡이다'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따로 제목을 기억한다던가 작곡자를 알지는 못했다. 한 때 클래식 음악에 얕게 관심이 있어 이것저것 검색할 때 들어본 곡 중에 하나이거나, 대중적이고 인기있는 곡이라니 어딘가에서 우연히 들어봤던 걸 게다. 들어가기 전에 친구가 산 팜플렛을 슬쩍 훑어보긴 했지만 관심 있는 <월광>만 좀 주의깊게 봤을 뿐 이건 제대로 보지 않아서 완전 문외한 상태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니 이 작품의 영감이 되는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이 곡을 듣는 내내 어떤 이미지들이 계속 형상화 되었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 변화하길 반복하더라는 거다. 이미 하루가 넘는 시간이 지나버려 말로 풀어내긴 좀 애매한 형상들인데, 하여간 1곡 부터 10곡까지 각 곡마다 중세시대의 동유럽쯤 되는 시공간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 움직이고 말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주인공이 와인 한잔 먹으면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더니, 이것도 그런 거? 하여간 되게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검색을 해보고서야 이 작품이 각 곡마다 토대가 되는 그림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아,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수 많은 이미지들이 형상화 되었구나. (물론 그림과 내 머리 속 이미지들은 많은 차이가 있지만;)
세 번째 연주에서 좋았던 건 이미지의 형상화도 있었지만 자리를 옮긴 탓에 손가락의 움직임을 조금이나마 자세히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연주 땐 얼굴이 더 자주 보이는 곳이어서 연주자의 Feel을 위주로 봤음) 김정원의 손가락은 마디마디 날개를 단 것처럼 훨훨 날아다녔다.(우주인 왈, "손가락이 너무 빨라서 막 잔상이 남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마디마디가 말 그대로 선반위를 굴러다니는 것 같았고, 그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영롱한 피아노 울림은 마치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또로롱 굴러가는 것 같다가도, 대지를 차는 말발굽 같기도 하고, 짹짹거리는 참새 같기도 하다가, 힘차게 돌아가는 풍차 같기도 했다. 흔히 작품에 빠져있는 예술인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열정, 목마른 갈증, 외로움, 그것을 끄집어내려는 욕망이 손가락 끝에서 터져나오는 것 같더라. 아아, 멋져.
그리고 내가 감탄해마지 않던 한 가지. 엄청나게 빠른 곡을 치면서도 수평을 유지하며 절대로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그의 손목. ToT 그것은 피아노 교본에서나 보던 자세가 아닌가 말이다. 피아노 선생님은 항상 말씀하셨다. 피아노를 칠 때는 손목은 부동자세로, 손가락을 이용해 쳐야한다고.(그래서 손가락 마디마디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조금이라도 빠른 곡을 치면 어김없이 손목이 위아래로 요동을 쳤는데, 무대 위의 그는 역시나 프로답게 손목 따위 천장에 매단 투명실이라도 있어서 거기에 묶어둔 듯 고정한 채, 손가락만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다. (도대체 '하농'을 얼마나 치고, 곡 연습을 얼마나 많이 하면 그렇게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면서도 손목을 고정시킬 수 있냐고 묻고 싶더라. ㅠㅠ)
본공연인 세 번째 공연이 끝나고 나서 연주자는 박수를 받고,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가, 또 다시 나와 박수를 받고, 또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 앵콜곡으로 몇 곡을 더 연주해주었는데, 그 앵콜곡이 (짧은 곡들이긴 하지만)무려 5곡이나 되어 친구와 나는 "꺄아아, 서비스 대작렬!"이라며 좋아했다.그 전에 잠깐 인삿말도 했는데, 곡명에 대한 설명, 리사이틀에 대한 각오, 그리고 대구 관객들이 매너와 호응이 참 좋다는 감상까지 시종일관 밝은 모습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도 참 흐뭇했다.(알아보니 일 공연이 앵콜 공연 수가 다른 데보다 많은 편이라고 한다^^) 인삿말 후, 앵콜곡을 들을 땐 죽은 듯이 조용하게 감상하다가, 끝나면 손바닥에 붉게 물들어 아프도록 박수를 치고 또 다시 앵콜곡을 들으며 행복해하던 토요일. 슈만의 곡을 끝으로 김정원의 연주회는 끝이 났다.
그러자 드는 생각이, 곡이며 연주자에 대해 좀 더 일찍 알아서 공부를 어느 정도 하고 갔다면, 훨씬 유익한 연주회가 되었을텐데, 조금은 아쉬웠다. 무언가에 대한 선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 느낌의 밀도, 그리고 온 몸의 남는 여운까지 그 정도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 법이니까. 물론 이런 아쉬움이야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아쉬움이고, 친구의 초대가 없었다면 경험해보지 못할 공연이었으니, 그저 연주회를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기회를 빌어, "우쥔! 고맙다 친구양, 공연 잘 봤어. 다음엔 우리 이승환 콘??(너무 비싸.ㅠㅠ)")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길, 뜻밖에도 공연이 너무나 좋았어서 나도 따로 팜플렛을 사야겠다는 마음에 판매대로 갔으나 다 팔렸다는 아쉬운 말에 '아까 살 걸!' 하는 후회를 두고 돌아나와야 했다. ToT 공연 후, 사인회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김정원의 CD를 사고 사인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와 친구는 또 다른 약속이 있어서 사인 못 받고 그냥 센터를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에잉, 가까이서 한번 더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다소 갑작스러운 피아노 연주회 관람이었지만, 예상 밖의 즐거움과 감동이 토요일 하루를 멋지게 장식해주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다면 그 땐 좀 더 공부를 하고, 조사를 해서 더 의미있는 감상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김정원 피아노 연주 CD 살거야!!!)
덧 ::
하나, 친구 말에 의하면 '호로비츠를 위하여'에 나온다고 한다. 난 그 영화를 띄엄띄엄 봐서; 잘 모르겠는데, 언뜻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다시 봐야지.
둘, 김정원 잘 생겼다. 훗. 그러니까 내가 마구 버닝할 타입의 얼굴은 아닌데, 호감가는 얼굴이다. (조명빨, 사진빨도 좀 있긴 하겠지만 어쨌든, 꽤 괜찮았어.)
셋, 또 다시 피아노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어!
2007/11/26 11:32
2007/11/2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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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공연을 택한 이유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듣기 위해서야. 정말 모르는 거니? 초걸작순수잔혹애니<프린세스 츄츄>의 화키아 사마 등장 BGM이란 걸!!!!! 롤로롤♪
우주인 / 어머, 그랬던 거였어? 몰랐어, 미안해. ㅠㅠ
<프린세스 츄츄>도 제목만 들어보고 못 봤어. ㅠㅠ 기회가 되면 한번 볼께.^^
간만에 츄츄 디비디 꺼내서 부비적 거리고 있다. 빌려줄까? 빌려줄까? *_*
우주인 / 이거 실시간 채팅?; 응, 빌려줘. 빌려줘. >_< (곱게 보고 줄게!)
참, 만화책 처분할 일 있음 꼭 나에게 해~ (캬캬캬)
옹냐 카에 만날 일 있으면 그 전에 나한테 말하삼. 건내줄게
우주인 / 파하하핫, 올해 내에 또 만날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알겠어.^^
아 맞다. 김정원, 그의 재빠른 손놀림은 잔상이 남을 정도였어효!!! (이런 멘트 쯤은 날려줘야 글이랑 맞겠지)
우주인 / 맞아맞아맞아!!! >_< (니 덧글 따라다니면서 답덧글 달기 재밌군.프흡)
그래, 이런 멘트 좋아.
(니가 지우고 다시 쓰는 바람에 나도 지우고 다시 쓰고 있음; 캭캭캭)
다음 접선은 구미에서로군!
카에 / 그런 거야? 그럼 파자마 파티에 와인과 케이크는 필수다! 캬캬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