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억/서가에 꽂힌 책2009/06/05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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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지음 / 푸른 숲 |
여행기나 여행에세이를 읽으면 대체로 마음이 들뜬다. 어디어디를 돌아다니며 어떤 경험을 했고 무엇을 느꼈노라, 하는 글들을 사진과 곁들여 읽다보면 당장이라도 떠나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어디든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발바리(...) 기질도 한몫하겠지만, 여행이란 모름지기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는 법이다. 그리 거창하고 긴 여행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한번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관광이 아닌 여행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서 늘 어딘론가 떠나는 꿈을 꾸며 이것저것 계획을 세웠다 무너뜨렸다 한다. 아직 혼자서는 제대로 된 여행 한번 해본 적 없는 겁쟁이일 뿐이지만……. 그런데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을 읽고나서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벅찬 감동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위안을 얻은 것 마냥 편안하다는 느낌이 먼저였다. 아마 '산티아고'의 특성상 일반적인 여행보다는 순례의 느낌을 더 많이 전해주어서일 게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 책 위에 손 얹고 명상에 잠긴 책은 참 오랜만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우리말로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뜻의 이 길은 도보순례로 유명한 길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는데 그중 프랑스 남부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에 이르는 '프랑스 길'이 가장 유명하다. 스페인어 '카미노(camino)'는 그냥 '길'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지만 '프랑스 길'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카미노(Camino)'가 '프랑스 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인다."(p.20)
고 한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은 저자가 이 카미노를 걸으면서 만난 사람들과 끊임없이 떠오르고 사라진, 혹은 새겨진 생각들의 기록이다.
극심한 혼란함과 슬픔을 벗어나고자 도피하듯 떠난 여행이라고 했다. 나를 찾는 여정이 아니라 나로부터 달아다니기 위한 일종의 도주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나에게는 sanna라는 필명으로 더 익숙한 저자가 조그마한 등산화 사진 한장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떠났을 때까지만 해도 흔한 배낭여행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 서두에 '나의 동생 김인배에게'라는 문구를 보았을 때도 별 생각이 없었건만 사실은 사연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불쑥 미안한 마음과 함께 숙연하고 진지해졌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마운틴 폴에 의지해 하염없이 산티아고로 걷는 저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보이지 않는 동행이 되어 천천히 책을 읽어나갔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동으로 다가왔던 건, 바로 '사람들'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산티아고 가는 길' 위에는 사람이 있었다. 모든 여행은 깨달음이 뒤따르지만, 그 깨달음에는 자연과 함께 늘 사람이 있다는 걸 나는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별것 아닌 사실이 이토록 뭉클하게 다가오다니 새삼 가슴이 벅찼다. 카미노를 걸으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수 만큼 다양했다. 글의 초반, 타인에 대해 이리저리 널뛰는 저자의 복잡한 감정이 마치 나인양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짜증도 났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마음이 열리는 걸 보며 나 역시 치유를 얻고 안식을 얻는 느낌이 들어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런가 하면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이란 제목처럼 혼자일 때 비로소 정리하고, 토해낼 수 있는 생각들도 존재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마침내 크루스 데 페로에서 동생의 사진을 묻으며 터뜨린 울음 앞에서는 나도 따라 울 수 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서 훌쩍훌쩍 울어서인지 그 부분을 넘기고 나자 잠이 쏟아졌다. 책갈피를 꽂아놓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내가 카미노를 걷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길이 어린 시절 내가 무척 좋아했던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뒷산 가는 길'과 닮아있어 나는 또 그리움에 훌쩍훌쩍 울었나보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눈 주위로 눈물자국이 길게 말라 붙어있었다.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아주 많은 책이었다. 특히 '머리 냄새 나는 아이'나 일마즈가 얘기해 준 산티아고 전설, 그리고 아름다움을 들이마시는 인디언들의 처방법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예쁜 이야기다. 할머니가 되면 (아니 되기 전에라도) 어린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 하듯 들려주고 싶다. 카미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말, 저자의 생각, 인용한 구절구절과 덧붙여진 해석들 모두 기억하고 싶은 것 투성이다. 도망치듯 떠났고 순례의 정신이라기보다 그저 걷고 싶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저자는 순례자의 임무를 마친 셈이며, 덕분에 독자로서도 순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평화를 조금이나마 느껴서 참 고마운 책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책을 덮으며 언젠가는 카미노를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안다. 아직은 마지막 비상구로 남겨두고 싶다. 지금보다 더 절박해지면, 혹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가 오면 오직 배낭 하나에 나를 압축해 넣고 카미노를 걸어보고 싶다. 하염없이 그 길을. 그때까지 이 말을 아껴놓는다. 부엔 카미노(buen camino)!
덧,
1. sanna님이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 몇 장과 짧은 글을 올려셨을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이 10초는 고정될 정도로 반한 사진이 있다. 푸른 들판 위로 길이 나 있고, 지평선 위에 그림처럼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사진이었다.

메세타 평원의 지평선 위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p.118~119)
바로 이 사진인데, 거의 다 왔다 싶으면 뒤로 물러나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 같았다고 했다. 이 사진이 책에 크게 담겨 있어서 정말 좋았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를 저 빛깔이 좋다. 여전히 퐁당 빠져 버릴듯한 사진이다. 이 사진 말고도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본 좋은 사진이 많다.
2. 블로그에 여행기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도중에 책으로 발행될 거라고 해서 은근히 설레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궁금하던 참에 책이 짠- 하고 나왔다.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들어서 기다림이 아무렇지도 않다. 예쁜 글씨체로 내 이름과 함께 정성스럽게 싸인까지 해서 책 보내주신 sanna님, 아니 김희경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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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책이 나왔습니다...
Tracked from 그녀, 가로지르다 2009/06/07 12:40 삭제봄비 내리는 날, 책이 나왔습니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된 원고였는데, 수정을 거듭할수록 제 생각이 덧붙여졌고 이젠 사람들 이야기인지 제 이야기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네요. 이런~ -.-;;; 최종 원고 교정을 볼 때부터, 광화문 네거리에 벌거벗고 선 것 마냥 망신살 뻗치기 전에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갈등으로 고민했습니다. 오랜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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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 에세이 보면 배가 아파져서... 어흐흑, 옹졸해서 큰일이에요. 근데 저 나무 한 그루 사진 예뻐요. 그림보다 더 그림 같네요.
부럽긴 하지요.^^ 저 사진 구도가 참 좋아요. 가로로 네등분, 거기에 소실점이 되고 있는 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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