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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은행나무




한  일 년 전쯤에 100페이지 가량, 그러니까 첫 챕터까지만 읽고 덮어두었던 책이다.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오히려 흥미로웠음) 어쩌다보니 읽다만 책이 되었다. 어젯밤에 생각나서 다시 펴들었는데, 앞내용이 띄엄띄엄 생각나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속이 다 후련하다. 처음 읽었을 때나 다 읽은 지금이나 평소 요시다 슈이치에 대한 인상을 뒤집는 책이라는 것만은 변함없다. <동경만경>을 생각하면 당연하지 않은가. '악인'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표지도 어찌나 강렬해주시는지, 한자 '악惡'자가 저렇게 크게 씌어져 있으니, 정말로 악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것 같다.-_-; 덕분에 막판에 흐름이 통속적으로 변해가도 끝까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계속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제목과 디자인 덕이 크다.

내용은 여러모로 <모방범>이나 <골든 슬럼버>와 비슷한 느낌이다.(모방범에 더 가깝다) 범죄 사건 하나 발생하면 그 놈의 와이드쇼 카메라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건 여전하다 싶은 게 구역질이 다 난다. 알 권리 어쩌구 하는데, 그 알 권리를 위한 짐을 왜 범죄자가 아닌 범죄자의 주변인이나 심지어 피해자와 피해자의 주변인이 짊어져야 하는 건지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알 권리 이전에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좀 지키고 알 권리 추구해라. 악의적으로 카메라 들이대면서 "심정이 어떻십니까?"라니. 그걸 몰라서 묻냐고 버럭 쏘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특종 하나 건지면 개떼 같이 달려들어 만신창이가 되도록 물어뜯는 언론에 대한 불신이 다시 한번 분노로 뭉글뭉글 솟아나는 장면. 그러면서 더 나올 게 없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다른 먹이 찾아가는 태도. 더 웃긴 건 거기에 편승해서 실컷 휘둘리는 일반인들. 그러나 과연 난 그렇지 않다고 완벽하게 자신할 수 있냐 하느면 그건 또 아니라는 게 슬프다. 이 패배감.

<악인>은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불편한 소설이다. 뚜렷하게 드러난 피해자와 가해자를 놓고, 어느 한쪽을 편들어 줄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었다면 어느 누가 피해자를 두고 '불쌍하다'고만 생각하겠으며, 또 어느 누가 가해자를 두고 '나쁜놈'이라고 욕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하면서 흔해빠진 원론 앞세우며 훈계하기도, 동정심에 사로잡혀  마냥 같이 슬퍼해줄 수도 없다는 게 작가가 노린 지점이 아닐까. 최초의 잘못을 저지른 사람까지 거슬러 올라가보지만 그 원죄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변수는 도처에 깔려있으며, 어차피 최종 행위자는 변하지 않으므로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 누구에게는 철천지 원수이자 악인인 사람이 누구에게는 마냥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거,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그 모순점이 소설 <악인>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는 독자에게 "여기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 과연 누가 악인일까요?" 하고 문제를 던져놓지만 논쟁만 있을 뿐 사실 해답은 없는 것이다. '누구나 피해자가 되고 싶어한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결국 악인의 규정은 개인의 몫이다.

제목만 봤을 때는 기리노 나쓰오 정도의 신랄함과 차가움을 떠올렸는데, 알고보니 미야베 미유키 풍의 따스함을 견지하고 있어서 의외였다. 거기에 나름대로 수위 높은 성애묘사와 더불어 묘하게 애정소설의 분위기가 나서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임을 보여준다. 작가가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던데, 그말 그대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부분이 제법 있긴 하다. 문득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떠오른다. 물론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훗, 그렇게 생각하니 책 읽는 내내 왜 그렇게 불편했는지 좀 더 확실하게 와 닿는다. 동어반복이겠지만 <우.행.시>에서 윤수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여기에서도 느껴져서 그랬구나 싶다. 동정심의 방향이 문제였어.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어쩌지 못할 결말 뿐인가 싶어 씁쓸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왜 이 소설이 인기있는지도 알겠다. 비극의 정서를 제대로 짚은 것이다. 사람들은 슬픈 이야기를 좋아한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아아, 이것도 저것도 모순 투성이로구나.


밑줄긋기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p.439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 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p.448
2009/06/08 22:42 2009/06/08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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