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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우리가 테이블에 앉았을 때, 조금 떨어진 자리에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 아직 밤이 되기는 일러, 손님은 우리와 그 사람들뿐이었다. 아마 남자는 이십대 후반, 여자는 이십대 중반쯤, 둘 다 인물도 괜찮고, 도회적이며 깔끔한 옷차림을 한, 아주 스마트한 분위기의 커플이었다.

 와인을 고르고, 음식을 주문하고, 그것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들었다기보다는 저절로 들려 왔지만), '이 두 사람은 깊은 사이가 되기 직전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내용적으로는 극히 평범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목소리의 톤으로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도 일단은 명색이 소설가이니, 그쯤의 남녀 마음은 읽을 수 있었다.

 남자는 '슬슬 꼬셔 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고, 여자도 '그냥 넘어가 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잘 되면 식사 후 어딘가의 침대로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테이블 한가운데 페로몬의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 쪽은 결혼한 지 30년이나 된 탓에, 과연 페로몬 같은 것은 그다지 떠돌지 않았다. 아무튼 행복해 보이는 젊은 커플이란 것은 옆에서 보고 있기만 해도 즐겁다.

 그러나 그런 약속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분위기도 프리모 피어트가 나왔을 때 글자 그대로 운산무소(雲散霧消)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 남자가 '츠르릅 츠르르릅!' 하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파스타를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압도적인 소리였다. 계절이 바뀔 때 한번, 지옥의 대문이 열렸다 닫혀질 때 한번 들을 수 있을 법한 소리. 그 소리에 나도 얼어붙었고, 아내도 얼어붙었고, 웨이터도, 소믈리에도 얼어붙었다. 맞은편 여자도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숨을 삼키고, 모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 당사자인 남자만은 무심하게, '츠르릅, 츠르르릅' 하고 너무나도 행복한 듯이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그 커플은 그 후 어떤 운명을 거치게 되었을까. 지금도 가끔씩 걱정이 된다.



<무라카미 라디오> '리스토란테의 밤'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권남희 옮김, 까치 




하루키에게 시큰둥하던 나를 관심 급상승하게 만든 에세이, <무라카미 라디오>
중고샵에서 별 생각 없이 산 책이었을 거다. 저 부분을 읽고 정말로 미친 듯이 웃어재끼며 데굴데굴 굴렀다. 눈물까지 나왔다. 따지고 보면 웃기려고 작정하고 과장되게 쓴 글도 아닌데 왜 그렇게 웃어댔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저 글을 읽는 순간, 저 시트콤 같은 상황이, 그리고 담담하게 할 말 다 하는 하루키의 모습이(정확히는 프로필 사진 속의 어쩐지 뚱한 하루키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말로 압도적인 소리였다. 계절이 바뀔 때 한번, 지옥의 대문이 열렸다 닫혀질 때 한번 들을 수 있을 법한 소리.' 이 부분이 압권이다. 원서에는 '혼또니(정말로)'가 두번이나 반복돼 있을 정도로 '츠르릅' 소리의 심각성(?) 이 폭발하는 지점이지만 나는 웃음이 폭발했다. 그 후에는 이런 사소한 거(?)에 그렇게 포복절도하며 웃는 내가 웃겨서 웃고, 생각하니까 계속 웃기고, 그래서 또 웃고...... 하여간 혼자서 키들키들 얼마나 웃었던지 모른다. 지금도 저걸 읽으면 괜히 입꼬리가 스르르 말리면서 또 웃게 된다. 씰룩씰룩. 가만히 있질 못한다.

때때로 소설보다 에세이 쪽이 더 정이 가는 작가들이 있다. 예를 들면 김영하라든가. 하루키도 내게는 그런 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 초년생 때 읽었던 하루키의 소설은 어쩐지 나랑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데(물론 요즘은 그것도 아니지만), 에세이는 뭘 읽어도 다 재미있다. <무라카미 라디오>를 시작으로 국내 출시된 에세이들은 거의 전부 긁어모아댔다. 모으는 김에 소설이랑 원서도 사고. 뭔가에 한번 꽂히면 콜렉션 만드는 병적인 집착도 한몫했지만, 하여간 하루키의 에세이들이 은근히 내 취향이라 정신 차리고 보면 장바구니 고고! 얼마 전에 대대적으로 책 정리를 하고보니 하루키 책만 번역본, 원서 합해 40권이 넘었다. 크악. 언제 이렇게.......;;;;;

작가들은 참 신기하다. 그러니까...음....대부분의 작가는 에세이도 좋은 편인데 그게 참 신기하다는 거다. 글로 밥 벌어먹는 사람의 공력이란 그 정도는 기본인건가?+_+ (에세이보다 소설이 좋은 경우도 있지만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이것도 취향에 따라 나뉜다) 붓가는 대로 술술 풀어내는 글 같은데도 어쩜 이렇게 깔끔하고 재미나게 군더더기 없는 글이 많은지. :-) 그 짧다면 짧은 글에서 오만 가지 생각을 파생시키는 것을 보면 과연 글쟁이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거? (이따금 블로거들 중에서도 신변잡기가 아니라 에세이/수필 같은 글을 쓰시는 분을 보면 참 부럽다. 나야 신변잡기도 좋아하지만. 헤헤)

그건 그렇고, 위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 나도 저 커플이 어쩐지 신경 쓰이는 걸? 과연 그들의 미래는? 사실 99% 호감을 가지고 있다가도 1%의 비호감 때문에 쫑나는 게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걸 생각할 때 어째 내가 다 걱정이 된다. 예전에 <올드미스 다이어리>였나. 오윤아가 소개팅을 했는데 남자 쪽이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외모 좋고 다 좋아서 주변에서 잘 해보라고 막 부추기던 에피소드가 있었다.(정확하지는 않다;) 그래서 오윤아가 그 남자에게 작업을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어느 순간 발견하고 말았다. 그 남자 귓속에 든 엄청난 귀지들을.(오.마이.갓!) 심지어 바깥까지 튀어나온 귀지들에 식겁을 하면서 미자와 지영에게 얘기했는데, 그 정도 조건이면 귀지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해서 참으려고 수없이 노력해봤지만, 결국 그게 안 돼서 남자에게 귀 좀 파라고 소리치면서 둘의 관계가 쫑나는 에피소드였다. 위의 두 커플을 보니 그 생각이 났다. 위의 두 사람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닐까? 아니지, 혹시 두 사람의 경우 스파게티만 안 먹으면 해결될지도!!! (평생 면 종류는 안 먹는 거지! 면 음식이 발달한 일본에서 그건 좀 어려운 일이긴 하겠지만;) 근데 만약에 다른 음식도 쩝쩝쩝, 우걱우걱, 추르릅 이렇게 (하루키 표현에 따르자면) 남들이 다 얼어붙을 정도의 지옥문 열리는 소리에 맞먹는 효과음을 내면서 먹으면.......? 아아, 더 이상 상상하지 말자. 그냥 두 분이 알아서 하셔야겠다.;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글은 단순하게 짧고, 전하는 메시지는 콩트만큼이나 단촐하다. 음식, 패션, 음악, 사진 등등... 하루키가 즐겁게 쓸만한 소재들. 제목을 '무라카미 라디오'라고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른한 잠을 쫓아내는 데는 명수인, 잡담 좋아하는 DJ처럼 그는 시종 수다스럽게 떠든다. 아기자기한 즐거움이다.
2010/02/02 22:00 2010/02/0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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