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억/서가에 꽂힌 책2010/02/02 22:00
(...전략)
우리가 테이블에 앉았을 때, 조금 떨어진 자리에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 아직 밤이 되기는 일러, 손님은 우리와 그 사람들뿐이었다. 아마 남자는 이십대 후반, 여자는 이십대 중반쯤, 둘 다 인물도 괜찮고, 도회적이며 깔끔한 옷차림을 한, 아주 스마트한 분위기의 커플이었다.
와인을 고르고, 음식을 주문하고, 그것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들었다기보다는 저절로 들려 왔지만), '이 두 사람은 깊은 사이가 되기 직전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내용적으로는 극히 평범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목소리의 톤으로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도 일단은 명색이 소설가이니, 그쯤의 남녀 마음은 읽을 수 있었다.
남자는 '슬슬 꼬셔 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고, 여자도 '그냥 넘어가 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잘 되면 식사 후 어딘가의 침대로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테이블 한가운데 페로몬의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 쪽은 결혼한 지 30년이나 된 탓에, 과연 페로몬 같은 것은 그다지 떠돌지 않았다. 아무튼 행복해 보이는 젊은 커플이란 것은 옆에서 보고 있기만 해도 즐겁다.
그러나 그런 약속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분위기도 프리모 피어트가 나왔을 때 글자 그대로 운산무소(雲散霧消)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 남자가 '츠르릅 츠르르릅!' 하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파스타를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압도적인 소리였다. 계절이 바뀔 때 한번, 지옥의 대문이 열렸다 닫혀질 때 한번 들을 수 있을 법한 소리. 그 소리에 나도 얼어붙었고, 아내도 얼어붙었고, 웨이터도, 소믈리에도 얼어붙었다. 맞은편 여자도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숨을 삼키고, 모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 당사자인 남자만은 무심하게, '츠르릅, 츠르르릅' 하고 너무나도 행복한 듯이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그 커플은 그 후 어떤 운명을 거치게 되었을까. 지금도 가끔씩 걱정이 된다.
<무라카미 라디오> '리스토란테의 밤'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권남희 옮김, 까치
하루키에게 시큰둥하던 나를 관심 급상승하게 만든 에세이, <무라카미 라디오>
중고샵에서 별 생각 없이 산 책이었을 거다. 저 부분을 읽고 정말로 미친 듯이 웃어재끼며 데굴데굴 굴렀다. 눈물까지 나왔다. 따지고 보면 웃기려고 작정하고 과장되게 쓴 글도 아닌데 왜 그렇게 웃어댔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저 글을 읽는 순간, 저 시트콤 같은 상황이, 그리고 담담하게 할 말 다 하는 하루키의 모습이(정확히는 프로필 사진 속의 어쩐지 뚱한 하루키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말로 압도적인 소리였다. 계절이 바뀔 때 한번, 지옥의 대문이 열렸다 닫혀질 때 한번 들을 수 있을 법한 소리.' 이 부분이 압권이다. 원서에는 '혼또니(정말로)'가 두번이나 반복돼 있을 정도로 '츠르릅' 소리의 심각성(?) 이 폭발하는 지점이지만 나는 웃음이 폭발했다. 그 후에는 이런 사소한 거(?)에 그렇게 포복절도하며 웃는 내가 웃겨서 웃고, 생각하니까 계속 웃기고, 그래서 또 웃고...... 하여간 혼자서 키들키들 얼마나 웃었던지 모른다. 지금도 저걸 읽으면 괜히 입꼬리가 스르르 말리면서 또 웃게 된다. 씰룩씰룩. 가만히 있질 못한다.
때때로 소설보다 에세이 쪽이 더 정이 가는 작가들이 있다. 예를 들면 김영하라든가. 하루키도 내게는 그런 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 초년생 때 읽었던 하루키의 소설은 어쩐지 나랑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데(물론 요즘은 그것도 아니지만), 에세이는 뭘 읽어도 다 재미있다. <무라카미 라디오>를 시작으로 국내 출시된 에세이들은 거의 전부 긁어모아댔다. 모으는 김에 소설이랑 원서도 사고. 뭔가에 한번 꽂히면 콜렉션 만드는 병적인 집착도 한몫했지만, 하여간 하루키의 에세이들이 은근히 내 취향이라 정신 차리고 보면 장바구니 고고! 얼마 전에 대대적으로 책 정리를 하고보니 하루키 책만 번역본, 원서 합해 40권이 넘었다. 크악. 언제 이렇게.......;;;;;
작가들은 참 신기하다. 그러니까...음....대부분의 작가는 에세이도 좋은 편인데 그게 참 신기하다는 거다. 글로 밥 벌어먹는 사람의 공력이란 그 정도는 기본인건가?+_+ (에세이보다 소설이 좋은 경우도 있지만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이것도 취향에 따라 나뉜다) 붓가는 대로 술술 풀어내는 글 같은데도 어쩜 이렇게 깔끔하고 재미나게 군더더기 없는 글이 많은지. :-) 그 짧다면 짧은 글에서 오만 가지 생각을 파생시키는 것을 보면 과연 글쟁이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거? (이따금 블로거들 중에서도 신변잡기가 아니라 에세이/수필 같은 글을 쓰시는 분을 보면 참 부럽다. 나야 신변잡기도 좋아하지만. 헤헤)
그건 그렇고, 위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 나도 저 커플이 어쩐지 신경 쓰이는 걸? 과연 그들의 미래는? 사실 99% 호감을 가지고 있다가도 1%의 비호감 때문에 쫑나는 게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걸 생각할 때 어째 내가 다 걱정이 된다. 예전에 <올드미스 다이어리>였나. 오윤아가 소개팅을 했는데 남자 쪽이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외모 좋고 다 좋아서 주변에서 잘 해보라고 막 부추기던 에피소드가 있었다.(정확하지는 않다;) 그래서 오윤아가 그 남자에게 작업을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어느 순간 발견하고 말았다. 그 남자 귓속에 든 엄청난 귀지들을.(오.마이.갓!) 심지어 바깥까지 튀어나온 귀지들에 식겁을 하면서 미자와 지영에게 얘기했는데, 그 정도 조건이면 귀지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해서 참으려고 수없이 노력해봤지만, 결국 그게 안 돼서 남자에게 귀 좀 파라고 소리치면서 둘의 관계가 쫑나는 에피소드였다. 위의 두 커플을 보니 그 생각이 났다. 위의 두 사람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닐까? 아니지, 혹시 두 사람의 경우 스파게티만 안 먹으면 해결될지도!!! (평생 면 종류는 안 먹는 거지! 면 음식이 발달한 일본에서 그건 좀 어려운 일이긴 하겠지만;) 근데 만약에 다른 음식도 쩝쩝쩝, 우걱우걱, 추르릅 이렇게 (하루키 표현에 따르자면) 남들이 다 얼어붙을 정도의 지옥문 열리는 소리에 맞먹는 효과음을 내면서 먹으면.......? 아아, 더 이상 상상하지 말자. 그냥 두 분이 알아서 하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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