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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크리스마스
10점
한혜연 지음
서울문화사(만화)

무척 가지고 싶었던 만화라 그냥 제목만 봐도 사랑스러운 <그녀들의 크리스마스>. 한국순정만화 최고전성기가 아니었던가 싶은 90년대에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선보였던 단편들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서 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하여 여성의 복잡하고 헤아리기 쉽지 않은 심리를 아주 담백하고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 총 5개의 단편으로 묶여있다.


Episode 1. 그녀들의 크리스마스
표제작이다. 고등학교 시절 자기 색깔이 너무 강해서 좀처럼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고 반에서 겉돌던 A, B, C, D가 수학여행에서 떨거지가 되어 같은 조로 묶이면서 우연히 마음 터놓고 친구가 되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우리는 베프야!'라고 말로 약속하지 않아도 충분히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그녀들은 고등학교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보내면서 5년 뒤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다. 나올 때는 꼭 애인을 데리고 나온다는 조건을 달고서. 그리고 5년 뒤. 정말로 그녀들은 그 카페에서 만나고, 지난 시간들을 서로에게 공유한다. 5년은 짧고도 긴 시간. 10대 때와 비슷하게 성장한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예상 밖의 변화를 보인 친구도 존재했다. 그건 단지 외모의 변화만은 아니다.

이 에피소드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 옛날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어린 마음에 애인을 데리고 나오기로 약속했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자신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 인간이 사랑하는 인간을 봄으로서 그 사람의 내면과 취향과 모든 것을 그대로 알 수 있으니까. 그건 수학여행의 그 밤에 자신들의 비밀을 털어 놓는 것보다 더 큰 비밀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나레이션은 이 단편의 의미를 단번에 응축시킨다.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없어 긴가민가한 지금, 친구와 애인들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는 D. 마지막 나레이션처럼 '먼 옛날 '사랑하라'고 말했던 사람이 태어난 크리스마스'에 D는 그 말을 따르기로 다짐한다. 5년 뒤 서른 살의 크리스마스에 다시 모이기로 한 친구들. 그 사이에 그녀들에게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또 어떤 사람이 옆에 있을지 궁금해진다. 같은 사람? 다른 사람? 그렇대도 혹은 그렇지 않대도 그녀들의 크리스마스가 계속 되는 한 지켜보고 싶어진다. 마치 내 얘기인듯, 친구의 얘기인 듯.


Episode 2.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한 주희.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고 오직 한 명, 초대하지 않은 서영이만이 벨을 누른다. 짧아진 주희의 머리카락과 서영이의 이야기.

아아 기억난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에피소드. 소녀여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 소녀여서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그 감정들이 좋다. 10대소녀들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공중에서 부유한다. 때로는 튕겨내고 때로는 흡수하면서 서로를 인식한다. 사랑과 우정과 동경과 미움이 동시에 부딪히는 그 시절. 유치하고 위태롭지만 그래서 더 솔직할 수 있었던 10대의 이야기. 순간의 감정을 포용할 수 있을 만한 어른이 아니어서 힘들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그마한 계기로도 마음을 열어보일 수 있는 그 나이의 감수성이 좋다. 한뼘씩 자라는 게 눈에 보이잖아.


Episode 3. 크리스마스 사막
모범생 종희, 날라리 쫑희. 하지만 소문 속에서 모범생 종희는 임신부가 되었고, 아이들은 날라리 쫑희라면 믿겠지만 종희는 그럴리가 없다고 반신반의 하며 소문을 나른다.

사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라는 속담에 부합하는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면, 또한 그것이 완전한 타인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카더라 통신을 들먹이며 '세상에~세상에~' 떠들어댈 것이다. 하지만 이 만화는 타인이 아닌 '나와 친구의 시선'으로 다가가며 이해의 여지를 만들고 있다. 읽다보면 종희가 답답하고 세상일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미움보다는 용서가 더 빨리 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크리스마스니까.


Episode 4. 가짜 크리스마스
재수생 소영이(아이디:폴로)은 대학생영화비평동호회에서 활동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생의 감투가 필요하다. 짧은 칭찬의 달콤한 맛이 그리워 거짓말은 지속되고, 그런 와중에 한 여자를 알게 된다.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에게 동호회 사람들은 한껏 호감을 내보이지만 소영이는 그 여자의 거짓말을 눈치 채고 정체를 의심스러워 한다.

나는 한혜연의 이런 점이 좋다. 더러 있을 법한 일을 차분하고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작가.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으면서도 한껏 누릴 수 있게 만드는 이런 에피소드 말이다. 실제와 만화의 간극을 메우면서도 떨어뜨려놓고 생각의 여지를 준다. 참 좋아. 정말로 크리스마스의 시작을 궁금케 만들고 있잖아.


Episode 5. 크리스마스에 말하라
윤진이와 도희는 유럽배낭여행을 계획하고 방학동안 붕어빵 장사를 하기로 한다. 그런 윤진이에게는 붕어빵 하면 생각나는 한 친구가 있고, 그 친구는 윤진이의 10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0대들의 주공간은 학교다. 학교는 열린공간이지만 한편으로는 숨막히게 폐쇄적이어서 차오르는 감정의 배출구가 없다. 하루 24시간 중 2/3를 보내는 학교에서 누군가에게 친구는 동료이자 가족이고 연인이며 정신적 지주가 된다. 그 나이대의 학교는 하나의 세계이고, 그 세계는 좁지만 그들에게는 전부이다. 친구가 나 아닌 다른 친구와 친하면 질투를 한다든가, 내가 잠시 엎드려 조는 사이에 다른 친구와 매점에 가버리면 까닭없이 외로워지고 심하면 눈물까지 나오는 게 그 세계에 사는 소녀들의 감성. 하물며 죽고 못살 것 같은 그 친구와 다른 학교로 진학을 해야만 한다면...? 글쎄 모르긴 몰라도 세계가 곧 파괴돼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이해는 할 수 있어.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같이 수면제를 먹자 해놓고 그 아이는 왜 의식을 잃어가는 윤진이를 두고 총총히 가버렸는지. "도와줄까?"라고 아무렇지 않게 나타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고민하고 괴로워했을지. 단지 무서웠기 때문일까?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고 그 뒤 윤진이의 이야기도. (+도희 나쁜것!)



<그녀들의 크리스마스>를 정의하는 키워드를 꼽아보라면 10대, 여자, 크리스마스를 꼽겠다. 이야기하는 현재의 시간이 20대라 해도 기억이 10대에 머물고, 모든 이야기는 크리스마스를 분기점으로 시작되고 이어진다. 특히 10대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소녀(혹은 여자)여서 더욱. 10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시절의 감성이 때로는 무서울 때가 있다. '한번쯤 돌아가고 싶다'와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이율배반의 감정이 시시때때로 상충하기도 한다. 결국 이쪽이든 저쪽이든 10대는 영원불멸인지도.
2010/02/21 23:28 2010/02/21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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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이 2010/02/22 20:54  덧글주소  수정/삭제  덧글쓰기

    어지간한 만화계의 레어템을 다 갖고 있는 뇨자(<-콜렉터 본능;)라 이 책도 갖고 있는데, 왜 내용을 보니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 기억이 흐릿흐릿한 건가 모르겠어요--;;;;;;; 저 책더미의 동굴 속 어딘가 파묻혀 있을텐데 조만간 발굴해서 다시 읽어야...orz

    한혜연의 감성 참 좋지요. 전 한혜연 단편집이 대개 '여성'의 감성을 담백하면서도 날카롭게 그려줘서 참 좋아해요. 공포물도 꽤나 소름 끼치게 그리셨죠.

    하...슬슬 저 책더미를 파헤쳐서 정리를 빙자한 다시 읽기를 해야할 시간이 오나 봐요. 전부 보고 싶어지는 걸 보니...^^;;

    • 다소 2010/02/23 01:39  덧글주소  수정/삭제

      전 진짜 지이님이 부럽사와요.ㅜ_ㅜ 지이님 '베이지톤삼색체크'도 갖고 있댔죠?(그것도 부럽) 저도 만화책 꽤 많이 산다고 자부했는데, 만화잡지 다 처분하고 나니까 90년대 초창기 단행본이 거의 없는 거 있죠. 그땐 잡지 샀으니까 굳이 단행본이 필요없어서...;;; 땅을 치고 후회중.

      아, 저 한혜연 공포물도 좋아해요. 그림체랑 어우러져서 사람 덜컥거리게 만들지 않아요? 화이트에서 연재되던 'M.노엘' 참 좋아했는데..폐간, 연중돼서 아쉬워요. 저도 남들이 리뷰 써놓으면 어렴풋이 기억이 날듯말듯 할 때가 있죠. 그러면 또 안 보고는 못 배기는 성격. 그럴 때 한번씩 끄집어내서 보고 나면 막 상쾌하기까지 하지용. 자자~ 지이님도 어서 발굴작업(?) 시작해서 우리 같이 즐겨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