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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의 미궁크림슨의 미궁
8점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정 옮김
창해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서 납치를 당하고, 눈을 떴을 때는 낯설고 작은 방안에 감금되어 있었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호텔방 같지만, 타의에 의해 그 방에 갇힌 사내에게는 그저 감옥일 뿐이다. 그 후 외부와의 연락은 철저히 차단당한 채, 그리고 자신을 납치한 게 누군지도 모른채 자살도 용납되지 않는 그곳에서 그는 15년동안 복수만을 꿈꾸며 체력을 단련해 나간다.

<크림슨의 미궁>의 도입부분은 언뜻 <올드보이>를 연상케 한다. 눈을 떠보니 기괴한 장소에 놓여져 있고, 설상가상 지난 밤의 일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그러나 깊게 고민해보기도 전에 당장 마실 물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 오대수가 좁은 공간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질리지만 재깍재깍 제공되는 만두를 먹으며 복수를 꿈꾼다면, 후지키 요시히코는 제한적이긴 해도 그보다는 넓은 공간에서 직접 먹거리를 조달해가며 각종 위험으로부터 생존을 도모해야한다. 과연 그곳은 어디일까.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후지키는 자신 외에 그곳에 납치 당한 사람이 여덟 명이나 더 있음을 알게되고, 각자에게 주어진 휴대용 게임기를 통해 미션을 수행, 종국에는 서바이벌 게임을 치루어야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게임기에 의하면 그들은 '화성의 미궁'으로 초대된 것이다) 모두가 기억을 더듬어 조합해보지만 공통점이라고는 어느 이벤트 행사에 응모했다는 것 뿐. 과연 그것이 시작이었을까? 주최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게임을 할 줄만 알았지 게임속에서 조종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현 상황에서 오로지 살기 위해서 게임 속 인물이 되어야 하는 그들. 게다가 게임은 제로섬이다. 먹지 않으면 먹힌다. 상황은 이제 <배틀로얄>이 되었다.

<검은 집> 이후로 기시 유스케는 무서운 작가가 되어버렸다.(오감 자극 소설 - 기시 유스케, [검은 집] 참조) 그는 심장이 옥죄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독자를 공포속으로 밀어부치는 데 능하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 작가의 책은 밤에 읽지 않도록 하는데, 어제는 무슨 배짱으로 새벽에 집어들었던 건지. 중반 넘어가면서 부터는 읽는 내내 이불 덮어쓰고 '무서워 죽겠네~'를 연발했다. <검은 집>과는 사뭇 다른 공포지만, 식은 땀 나게 만드는 기술은 이 작품에서도 유효하달까. (다 읽고 자다가 꿈도 꿨다.ㅜ_ㅜ) 99년작이니 딱 10년 전 작품으로 시대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지만 묘하게 고전적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는데(물론 당시에는 나름대로 신선했겠지만;) 그게 공포심을 더 키운 게 아닌가 싶었다. 밤에는 옛날이야기가 더 무서운 법이지.

어릴 때 해리슨 포드 주연의 <도망자>를 보면서 굉장히 무서워했었다. 잘못도 없이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이라는 건 억울하면서도 끔찍하게 공포스러운 것이다. 이 책은 딱 그런 유의 공포를 선사한다. 하물며 뒤쫓아 오는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 식시귀인 다음에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인정에 호소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공포가 아닌가 말이다. 인격이 배제된 식시귀가 한 때는 동일 조건에 있었던 동료였고, 그 변화가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계획된 것이라는 걸 생각하니 더욱 무서워지는 것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배신하라'는 말초적인 문구는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을 매우 건조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인간도 엄밀히 말하면 동물이어서 그런 상황에서는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을 수밖에 없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걸까.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예능 프로그램 중에 '인생극장'이란 게 있다. 이휘재가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게 만든 프로그램인데 컨셉은 이렇다. 상황극이 펼쳐지고 어느 순간 주인공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인생이란 늘 선택의 연속이라는 거창한 의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선택은 주인공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는 예능답게 두 가지 선택의 결말을 다 보여줌으로서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대리만족을 경험케 하는 것이다. <크림슨의 미궁>에서도 이 선택의 갈림길이 시시때때로 나온다. 주인공이니까 결론적으로 옳은 길을 선택해갈 거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상당수 그렇게 진행되어 다른 선택지가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사실은 그것마저도 신(여기서는 게임 주최자)의 뜻에 의한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마음이 무거워지고 만다. 게임의 엔딩은 세가지. 배드엔드, 해피엔드, 그리고 트루엔드. 과연 책에서 보여주지 않은 엔딩은 도대체 어떤 결말이었던 걸까?

다 읽고나서 나는 '호접지몽'을 떠올렸다. 장자는 꿈에서 나비가 되었고, 깨고나서는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후지키의 마지막을 보며 과연 후지키가 게임 속에서 빠져나온 건지, 아니면 아직 게임 속에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것이 실체고 허상인지 모를 혼돈. 이것이 작가가 원한 결말일까?  혹시 인간은 신 혹은 신적 존재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다는 그 허무함을 안겨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좀 염세적인가?;; 그래도 그 안에서 열심히 발버둥치다보면 결말을 조금 바꾸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니까 이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일지도. 꼼꼼한 자료조사와 그걸 펼쳐보이는 능력, 복선의 활용, 공포를 맛깔스럽게 버무리는 솜씨까지... 간만에 기시 유스케의 매력을 왕창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 같아 즐겁다. 추리(공포) 소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추천하겠다. 다음에는 얼마전에 번역·출간된 그의 데뷔작(13번째 인격)을 읽어봐야겠다.



+
1. 오타 발견 - 410p. 4째 줄 : 아퀴가 맞았다. → 아귀가 맞았다.
2. 소설의 배경이 된 오스트레일리아 벙글벙글 국립공원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 똑같아서 무서웠다. 기시 유스케의 묘사 능력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나?(긁적)
2010/02/22 23:22 2010/02/22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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