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설을 읽고나면 옛날 생각이 울컥 밀려와서 괜히 좀 그리운 심정이 되고 만다. 내용이 아니라 분위기 때문에. 고전적인 영미 추리소설을 읽고나면 어릴 때 셜록홈즈니,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같은 소설 읽으면서 '나는 탐정이 될 거야'하고 호기롭게 말하고 다녔던 게 생각나서 부끄럽고 즐거운 기분이 된달까.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 탐정 같은 게 어디있다고. -_-; 책에 나오는 건 다 실화를 각색한 거라고 믿었던 때여서, 분명히 어딘가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히 탐정이 있는 줄 알았지. 소설이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라는 건 아예 생각도 못했나보다.
느지막이 눈 뜨자마자 가장 가까운 데 있던 책 집어서 읽었는데, 중간에 끊을 새도 없이 줄줄 읽혀서 다 읽고나니 점심시간. 이 책은 내용은 하나도 모르면서 제목은 눈에 자주 띄어서, 읽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읽은 것 같은 그런 책이었는데, 이번엔 진짜로 읽었으니 '나 읽었어요!' 라고 흔적은 남겨놔야지. 사실 그런 책 많다. 고전의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어디어디 필독도서100선에 내로라 하는 고전이 주욱 실려있는 걸 보면, 내가 읽은 건 채 30권도 안 되더라. 근데 제목이랑 줄거리는 대충 다 안다는 게 고전이 지닌 아이러니지. 암튼 이 책도 추리 장르에서는 고전이라면 고전인데, 나는 (잘 알려진 소설만 아는) 여기저기 널린 스타일의 추리소설독자라서 작가 이름이 좀 생소했다. 알고보니 윌리엄 아이리시랑 동일인물이라고. <환상의 여인> 작가라니까 왠지 새로 보게 된다. (사실 <환상의 여인>도 읽지는 않았음. 명성만 익히 들었을 뿐)
이 작가 스타일 있다. 작품 하나로 단정하긴 어렵지만 이 작품 안에서 스타일은 확고하다. 사건하나 툭 던져주고 약하게 시작, 계단 밟듯이 착착 올라가서 드디어 평지를 만난 듯 편안하게 마무리. 크게 격정적이진 않지만 독자의 궁금증을 살살 건드려줘서 자꾸만 다음 장을 넘기게 된다. 7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어서 각 챕터가 끝날 때마다 개별 사건이 종결이 되는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인데, 모두 미해결로 끝나기 때문에 긴장감은 계속 이어진다. 발단이 되는 사건 말고, 본격적인 살인이 세 번 이어지면서 공통점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그걸 토대로 경찰은 나머지 살인을 막으려고 하지만 죽을 사람이 묘자리 찾아가는 데에야 별 수 있나. 독자는 마지막까지 같이 달릴 뿐이다. 범인이 어떻게 대상을 알고 꼬여내는지, 어떻게 그렇게 딱딱 맞춰서 계획대로 처리를 하는지는 완벽한 미스터리. 심지어 피해자의 행동까지 예상하고 실행한다는 점에서는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고전의 테두리 안이라 이런 것도 왠지 납득. -_- 요즘처럼 리얼리티 강조하는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가 이런 점도 분위기 있어보인다. 마지막 체포 땐 너무 급작스럽게 호흡이 빨라지는 감이 있었는데, 이미 본사건이 다 끝나버린 뒤라 질질 끄는 것보다는 나았을 수도 있겠다 싶고. 추리소설이면서도 묘하게 로맨스의 기운이 풍기는 소설이었다. 애초에 범인이 사건을 저지르는 배경이 그랬기도 하고, 살해대상 선정과 그로 인한 효과(?)도 사랑을 모르는 남자라면 그리 효율적인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희생자는 무고하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비극이다-_ㅠ)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이런 사람이 읽어야 한다.
예컨대, 높은 건물 위에서 아무 생각 없이 침을 뱉거나 물 쏟아버리는 사람들, 한술 더떠서 일부러 그렇게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이 곤란해 하는 걸 즐기는 사람들. 자기가 한 사소한 일이 다른 사람한테는 생명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거, 그게 자기한테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는 걸 이 소설 보면서 좀 뜨끔해야 한다. 얼마전에 드라마보니까 고속도로에서 커피 컵을 휙 버렸다가 뒤따라 오는 자동차 앞 유리에 쏟아지면서 사고가 날 뻔한 장면도 있던데, 그러면 안 되지. 벌 받아요.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죽은 개구리 남편이 밤마다 꿈에 괴물개구리로 나타나서 잠 못자게 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구!
그나저나 이 소설을 읽고 생각난 또 다른 말은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랄까? 혹은 머피의 법칙? -_-
고등학교 때 내 친구가 나한테 팔짱을 끼고 룰루랄라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데, 아 글쎄 새똥이 내친구 팔 위로 툭- 떨어지는 게 아닌가. -_-; 보통 그런 상황이면 같이 새똥을 맞거나 그랬어야 하는데 정확하게 팔짱을 낀 내친구 팔위로만 떨어졌다. 팔짱 안 꼈으면 내가 맞는 거였는데, 팔짝 끼는 바람에 그 친구가……. 더 가관인 것은 친구 달래려고 비싼 즉석 떡볶이 시켰는데, 그거 만들어주는 점원이 실수로 국물을 왕창 튀기고 말았다. 근데 그것도 모조리 그 친구한테만 튀어서 그 친구는 결국 엉엉 울어버렸다는 거. -_-;;;;;;; 흰 교복에 누런 새똥도 모자라 떡볶이 국물이라니... 한참 민감한 고3때인데다 수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애라 그런지 "난 왜 이렇게 재수없는 거야!"하고 우앙~ 우는데, 뭐 할 말이 있어야지. (다른 친구는 그런걸로 우는 게 웃겨서 배꼽 잡고. 그 친구는 친구가 웃는다고 더 울고. 아주 난리 법석이었음)
아무튼 난 왜 자꾸 그 생각이 나는지.
우연으로 시작한 사건이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커져가듯 나로 하여금 잊혀진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괜찮은 고전 추리소설이다. 이 번역본 초판년도가 무려 1977년이라는데(헉), 더 빨리 읽었으면 훨씬 재미있었겠지만, 더 늦지 않게 읽어서 다행이다. 다음은 <환상의 여인>. (근데 번역본이 왜 이렇게 많아? 고르기 힘들어. 끙 -_-;)
덧,
1. 맞춤법 오류 발견
이래뵈도(X) → 이래ˇ봬도(O)
p.56어제 읽은 책에 이어 연달아 틀려주시니, 순간 내가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건가 싶었다. 다행히 그건 아니고.
과연, 사전에도 틀린 보기가 나올 만큼 자주 틀리는 맞춤법이 맞구나 싶다.;
비슷한 용례로, 뵈요(X) → 뵈어요 혹은 봬요(O)
2. 제목은 언제봐도 참 독특하다. 읽고나니 더 독특해.
참고로 원제는 RENDEZVOUS IN BLACK.
3. 요정도 책 크기 사랑한다.(세로 20cm가량)
해문 문고본보다는 조금 크지만 이 정도면 손에도 잘 잡히고, 가방에도 쏙쏙 들어가고.
우리나라는 적정 수요가 못 돼서 문고본 시장이 생길려다 망했지만, 그래도 요런 책들 보면 문고본 시장이 좀 활성화되면 좋겠다 싶긴 하다. 하지만 출판계 사정 알면 암담-_-;
2009/06/07 12:44
2009/06/0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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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엄청 놀랐어요. 가스 폭발 사곤줄 알았다니까요. 일본도 아니고... 일케 생생한 지진을 경험할 줄은 몰랐어요. 우와앙...
전 몇 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하긴 했었는데, 이번이 그중에 제일 센 거 같아요.; 아아, 한국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예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