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집 근처의 한 도서관에서 나는 800번대 코너를 서성이고 있었다. 대개는 도서관에 갈 때 미리 읽을 것을 정해놓고 가지만, 가끔은 이런 식으로 아무 코너에서나 제목을 따라 이동하다가 인연이 닿는 책을 고르기도 한다. 그 날은 800번대였다. 국내에 있는 대부분의 도서관은 한국십진분류법에 따라 책을 분류하는데, 이에 따르면 800번대는 문학도서를 뜻한다. 나는 그 문학 코너에서 처음 김연수를 만났다. 제목은 [청춘의 문장들]이었다. 나는 그 책을 울면서, 웃으면서, 감동하면서, 때론 울컥, 때론 씁쓸해 하면서 그렇게 읽었다. 그 단정한 문장들이 내 안에서 그렇게 격렬하게 화학 반응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나도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저 그땐 그랬다고 기억할 뿐이다. 어쨌든 나는 김연수를 기억하게 됐고,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읽었고, 그리고 그의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 모았다'는 것이다. 참 이상도 하지, 신간이 나오는 족족 사면서 그 이후로 나는 그의 책을 읽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예쁘다고 사서는 고이고이 아끼다가 결국 전시용으로 전락하고 마는 엄마의 예쁜 그릇 같은 경우일까? 그치만 '아끼다 똥된다'는(>_<) 모님의 말처럼 나는 어쩜 그의 책을 아껴만 두다가 썩혀버리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읽기를 두려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높은 기대 심리로 지레 실망하고 싶지 않은 데에 대한 방어기제 같은. 그러던 내가 이번에 나온 신간은 왜 이렇게 (비교적) 빨리 읽어버렸는지, 역시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저 서점에서 본 꽃분홍 표지가 내 시선을 끌더라고, 띠지인지 표지인지 모를 사진 속 여성의 감춰진 얼굴이 보고싶더라고, 바람에 흩날리는 그 풍성한 머리카락과 반쯤 몸통을 튼 그녀가 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가 궁금하더라고, 오직 그렇게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이 책을 펼쳐든 건 지하철에서였다. 평소라면 버스를 이용하지만 퇴근 후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탔던 참이다. 고작 9개의 그 짧은 구간 사이의 시간이 무료해 나는 아침에 가방에 넣어 간 책을 펴들었다. 그리고 몇 분 후 하마터면 목적지를 지나칠 뻔 했다.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었냐고 묻는다면 사실 내 대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조금은 지루하다거나 혹은 난해하다거나 그래서 재미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를 놓칠 뻔 할 정도로 몰입을 한 건, 아마 그 문체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분위기와 그로 인한 감정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책 읽기를 마칠 때까지, 아니 책을 덮고나서도 꽤 긴 시간 유효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읽었다. 읽는 내내 나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감정들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다. 예를 들면 외롭고 따뜻하다든지, 슬프고 웃긴다든지하는 것들. 이해가 안 가 고개를 갸우뚱 하거나 슬며시 짜증이 치솟다가도 어느 순간 공감해버리고 마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미미한 현기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게 이 소설집의 참 맛일까? 9개의 단편을 다 읽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채워지는 듯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허전해왔다. 그것은 여운일까? 확신할 수 없어서 나는 다시 한번 책을 읽기로 했다. 이번에는 좀 더 천천히 음미하면서.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상실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 지금 없는 누군가를 추억한다는 것은 늘 그렇지만 즐겁고 외로운 일이다.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웃음을 머금다가도 종국에는 지금 곁에 없다는 사실이 시리게 아픈 법이다. 케이케이를 그리워 하는, 그래서 그의 나라를 찾아 온 그녀의 이야기에서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나는 사무치는 그리움의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정작 날 울려버린 건 해피의 이야기였다. 특히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의 아파하는 소리를 절규하듯 따라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날 때부터 연약했던 그 작은 심장하나가 멈췄을 뿐인데 지구가 완전히 텅 비어버렸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아이가 군살처럼 느껴지던 나날들이 차라리 행복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가슴이 툭하고 떨어졌다. 몇 줄 안 되는 이 문장에서 해피의 고통이 내 것처럼 전해져왔다. 어떡해...어떡해...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그녀와 해피가 서로를 이해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통해 '자신'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상처가 아물듯 조금은 그렇게.
기억할 만한 지나침10대의 여자(소녀가 아니다)란 타인은 쉽게 이해할 수도, 하려고도 해선 안되는 감성의 집합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긍정하고, 부수었다가 다시 완성하며 성장을 거듭한다. 번데기를 탈피해 성충이 되어가는 나비처럼 단단한 외벽을 만들었다가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두렵지만 반드시.
세계의 끝 여자친구
표제작이자 이 소설집에서 가장 서정적이고 예쁜 이야기다. 거창하게 생각했던 세계의 끝이 사실은 호수 건너 편 메타세쿼이아까지라는 것에 볼멘소리를 늘어놓고 싶었지만, 숨겨진 이야기가 마음을 적셔서 그 순간부터는 오히려 정말로 거기까지가 모든 세계의 끝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무 아래 묻힌 이야기는 마치 사랑의 전설 같았고, 마플 할머니 같은 희선씨와 순진해 뵈는 청년이 괜시리 마음에 들었던 단편.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아주 최근의 뉴스가 작은 소재로 차용되고, 관계 설정이 흔하다면 흔한지라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쉽게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래 전에 헤어진, 한 때는 연인이었던 사람이 생각났고, BGM으로는 왠지 김연우의 '이별택시'가 깔려야만 할 것 같은 이야기. 정말로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난 그 노래를 찾아들었고, 살면서 한번쯤 그 사람과 정말 우연히 마주치게 될 확률을 생각해보았다.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보다 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건 마지막 장에 인용되는 편지 문구일 것이다. 벌써 잊혀지고 있는 그 사건이 슬펐고, 벌써 잊어가고 있는 나여서 미안했다. 그래서 또 다시 눈물. 하지만 곧 이어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언가를 이야기 하는 마무리가 있어 마음이 따뜻했다. 다행이야.
모두에게 복된 새해 - 레이먼드 카버에게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07>에서 이미 접했던 단편이다. 두 번째 읽는 거라 익숙한 탓도 있겠지만, 난 이 소설 속의 두 인물이 참 좋다. 한 인물 혹은 사물에 대해 두 사람의 다른 시선이 결국은 각자의 이해로 이어지는 그 과정이 마음에 든다. 처음 만나 서먹서먹했던 공기가 훈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져서 내 마음도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모두에게 복된 새해가 될 것만 같은 느낌. 아, 그리고 역시나 사놓고 읽지 않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한희정의 '휴가가 필요해'를 나른하게 흥얼거리며 읽었지만, 사실 내용은 어쩐지 미스테리했고, 그래서 가장 눈을 반짝이며 읽었던 단편이다. 휴관일을 제외하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출근 도장을 찍어 어느새 도서관의 전설처럼 돼 버린 한 노인이 어느 날 익사체로 발견되었단 뉴스는 도서관 직원들에게 충격이자 이슈가 되기에 충분한 뉴스. 당연히 그 노인의 출신과 노인이 매일 보던 책들의 이력이 화제거리가 된다. 마치 영화 <러브레터>에서 '후지이 이츠키 독서 카드 찾기 게임' 같은 재미를 느낀 건 잠시, 로맨틱한 노인이었기를 기대하는 내 바람과는 달리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는 역사와 시대의 아픔이고, 한 인간의 고독과 고통이었다. 마음 한 켠이 무거웠던 단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난 이 두 단편에 대한 느낌을 좀처럼 정리할 수가 없다. 전자에 대해서는 머리 위로 부유하는 말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 하는 탓이고, 후자는 내 이해의 폭이 좁은 탓이다. 어렴풋이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은데... 말로 설명을 못하겠어.'라고 소심하게 중얼중얼.
달로 간 코미디언마치 다큐나 실화를 소재로 만든 영화라도 본 느낌이다. 한 희극인의 비극적인 인생 추적이랄까. 구성, 주변 인물, 클라이막스의 반전, 그리고 마무리까지 다 좋았다.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의 마지막 문장이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로 걸어갔다'인데, <달로 간 코미디언>은 마치 정적 속 진정한 소리로 걸어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주며 끝이 난다. 혹은 암흑 속 빛으로. 이 단편에도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사건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또한 현실의 인물이 이야기 속에 등장해 현실감을 강하게 부여한다. (난 정말로 희극인 안복남 씨가 있나 검색까지 해봤다;) 아,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안피디의 이름이 내 친구랑 똑같아서, 게다가 캐릭터마저 뭔가 비슷해서 정말 몰입해서 봤다. 책 내용 자체가 그 친구가 좋아할 타입이라 한 권 더 사서 선물로 줘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앞서 김연수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노력해야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맞는 말이다.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 봄으로써 '나'를 이해하고, 더하여 '우리'를 이해하게 되면 결국 '너' 역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외로움을, 쓸쓸함을, 그리움을, 방황을, 고통을 그려놓았지만 비관적이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담담하게 똑바로 맞서는 모습을 그려줘서 참 고맙다. 그래서 외롭지만 따뜻했고, 슬프지만 웃을 수 있었던 거였다.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 절망하지 않는 게 핵심이라고 했는데, 어쩌나~ 난 이미 토닥토닥 위로 받은 듯한 느낌이 드는 걸. 이제는 김연수의 책을 마냥 '사 모으는'게 아니라 '마침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세계의 끝은 실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다행이야. :-)
2009/11/03 00:02
2009/11/03 00:02
덧글을 달아 주세요
신속한 다소님, 감사. 내가 보내놓고도 솔직히 리스트는 기억 안 난다. 버린 게 많다보니 헷갈리네. 폐쇄자 다시 생각해도 아깝...진짜 갈등하다가 처분했는데 흑. 헤븐은 신혼집에 있을거야. 담번 준수 기저귀 사면 2차 발송할게.하하 >_< 감상은 너의 주관에 맡기겠어. 근데 **은 정말 최고지 않냐? 남장여자 단편물 중에 누가 뭐래도 제일 사랑한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편지 쓰다가 결국 뛰쳐나가는(?) 캬하하하하하 아 다시 생각해도 역시 설렌다. 이럼 또 아쉬워지는데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뭐야)
차차 애니도 녹화했다!!! 지금도 집안 어딘가 먼지 쌓여가고 있을 것으로 예상 (역시나 방치되고 있는 나의 청춘)
너 리스트 기억 안난대서 일부러 사진 따로 찍고 그거보고 목록 적을랬는데, 정리하려니 제대로 안 보여서 때려쳤다. 캉항항. 폐쇄자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저 폐지로 수집되지 않고 어느 '매의 눈'을 가진 만화애호가의 손에 구조당했기만을 바랄 뿐이다. 흐흐. 니가 보내준 만화들 감상 중 첫 번째는 '답신'이 될 확률이 큼. 진짜 얼마나 좋았던지. 후후.>_< 차차 정말 좋아했구나? 녹화까지 했다니. 쿠하하. 난 그 옛날 세일러문 볼라고 학교 종치자마자 집에 쏜살같이 가곤 했는데(후~) 나도 녹화해놓은 거 어딘가 있을 텐데....네 말마따나 방치되고 있는 청춘이로구나~
[3번가의 기적] 재밌어요!! 저도 이사하면서 처분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끙끙 다 끌어안고 왔더랬지요. 새삼 저도 먼지쌓여가고 있는 청춘의 흔적들을 어찌해야할지 고민이 되는군요...후;;
오옷, misha님도 재밌다고 말씀하시니 더욱 기대가 되네요. 그렇다면 기필코 3권, 9권을 구하고 말리라. 전 우주인이 보내준 만화들 보면서 언젠가 저도 그렇게 나의 청춘들을 정리해야될 것 같아서 쓸쓸해지기도 했어요. 가능하면 무덤까지 이고 가고 싶긴 하지만.... 과연..... ㅠㅠ
득템(?) 축하드립니다~하하. 저랑 겹치는 책들도 조금 보이는군요. <진홍색 의자>는 완전 추천작이에요!!
번역이...의외로 시간이 엄청 걸린다는; '읽고 이해하는 것'에서 '남들도 이해하게끔' 표현해주는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죠^^;
그렇게 재밌어요? 오오오~ 기대급상승!!!!!!
전 뭐 번역이라엔 민망한 독해 수준인데도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든지...ㅠㅠ 좌절 백만번씩 해요 요즘...ㅠㅠ 그리고 작문 너무 힘들어서 막 울고 싶고요. 듣기는 그래도 늘어가는 것 같은데...작문은 진짜....어휘력이 어찌나 딸리는지....우엥.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