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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 랑데부
코넬 울릿치 지음, 김종휘 옮김
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이런 소설을 읽고나면 옛날 생각이 울컥 밀려와서 괜히 좀 그리운 심정이 되고 만다. 내용이 아니라 분위기 때문에. 고전적인 영미 추리소설을 읽고나면 어릴 때 셜록홈즈니,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같은 소설 읽으면서 '나는 탐정이 될 거야'하고 호기롭게 말하고 다녔던  게 생각나서 부끄럽고 즐거운 기분이 된달까.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 탐정 같은 게 어디있다고. -_-; 책에 나오는 건 다 실화를 각색한 거라고 믿었던 때여서, 분명히 어딘가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히 탐정이 있는 줄 알았지. 소설이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라는 건 아예 생각도 못했나보다.

느지막이 눈 뜨자마자 가장 가까운 데 있던 책 집어서 읽었는데, 중간에 끊을 새도 없이 줄줄 읽혀서 다 읽고나니 점심시간. 이 책은 내용은 하나도 모르면서 제목은 눈에 자주 띄어서, 읽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읽은 것 같은 그런 책이었는데, 이번엔 진짜로 읽었으니 '나 읽었어요!' 라고 흔적은 남겨놔야지. 사실 그런 책 많다. 고전의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어디어디 필독도서100선에 내로라 하는 고전이 주욱 실려있는 걸 보면, 내가 읽은 건 채 30권도 안 되더라. 근데 제목이랑 줄거리는 대충 다 안다는 게 고전이 지닌 아이러니지. 암튼 이 책도 추리 장르에서는 고전이라면 고전인데, 나는 (잘 알려진 소설만 아는) 여기저기 널린 스타일의 추리소설독자라서 작가 이름이 좀 생소했다. 알고보니 윌리엄 아이리시랑 동일인물이라고. <환상의 여인> 작가라니까 왠지 새로 보게 된다. (사실 <환상의 여인>도 읽지는 않았음. 명성만 익히 들었을 뿐)

이 작가 스타일 있다. 작품 하나로 단정하긴 어렵지만 이 작품 안에서 스타일은 확고하다. 사건하나 툭 던져주고 약하게 시작, 계단 밟듯이 착착 올라가서 드디어 평지를 만난 듯 편안하게 마무리. 크게 격정적이진 않지만 독자의 궁금증을 살살 건드려줘서 자꾸만 다음 장을 넘기게 된다. 7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어서 각 챕터가 끝날 때마다 개별 사건이 종결이 되는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인데, 모두 미해결로 끝나기 때문에 긴장감은 계속 이어진다. 발단이 되는 사건 말고, 본격적인 살인이 세 번 이어지면서 공통점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그걸 토대로 경찰은 나머지 살인을 막으려고 하지만 죽을 사람이 묘자리 찾아가는 데에야 별 수 있나. 독자는 마지막까지 같이 달릴 뿐이다. 범인이 어떻게 대상을 알고 꼬여내는지, 어떻게 그렇게 딱딱 맞춰서 계획대로 처리를 하는지는 완벽한 미스터리. 심지어 피해자의 행동까지 예상하고 실행한다는 점에서는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고전의 테두리 안이라 이런 것도 왠지 납득. -_- 요즘처럼 리얼리티 강조하는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가 이런 점도 분위기 있어보인다. 마지막 체포 땐 너무 급작스럽게 호흡이 빨라지는 감이 있었는데, 이미 본사건이 다 끝나버린 뒤라 질질 끄는 것보다는 나았을 수도 있겠다 싶고. 추리소설이면서도 묘하게 로맨스의 기운이 풍기는 소설이었다. 애초에 범인이 사건을 저지르는 배경이 그랬기도 하고, 살해대상 선정과 그로 인한 효과(?)도 사랑을 모르는 남자라면 그리 효율적인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희생자는 무고하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비극이다-_ㅠ)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이런 사람이 읽어야 한다.
예컨대, 높은 건물 위에서 아무 생각 없이 침을 뱉거나 물 쏟아버리는 사람들, 한술 더떠서 일부러 그렇게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이 곤란해 하는 걸 즐기는 사람들. 자기가 한 사소한 일이 다른 사람한테는 생명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거, 그게 자기한테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는 걸 이 소설 보면서 좀 뜨끔해야 한다. 얼마전에 드라마보니까 고속도로에서 커피 컵을 휙 버렸다가 뒤따라 오는 자동차 앞 유리에 쏟아지면서 사고가 날 뻔한 장면도 있던데, 그러면 안 되지. 벌 받아요.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죽은 개구리 남편이 밤마다 꿈에 괴물개구리로 나타나서 잠 못자게 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구!

그나저나 이 소설을 읽고 생각난 또 다른 말은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랄까? 혹은 머피의 법칙? -_-

고등학교 때 내 친구가 나한테 팔짱을 끼고 룰루랄라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데, 아 글쎄 새똥이 내친구 팔 위로 툭- 떨어지는 게 아닌가. -_-; 보통 그런 상황이면 같이 새똥을 맞거나 그랬어야 하는데 정확하게 팔짱을 낀 내친구 팔위로만 떨어졌다. 팔짱 안 꼈으면 내가 맞는 거였는데, 팔짝 끼는 바람에 그 친구가……. 더 가관인 것은 친구 달래려고 비싼 즉석 떡볶이 시켰는데, 그거 만들어주는 점원이 실수로 국물을 왕창 튀기고 말았다. 근데 그것도 모조리 그 친구한테만 튀어서 그 친구는 결국 엉엉 울어버렸다는 거. -_-;;;;;;; 흰 교복에 누런 새똥도 모자라 떡볶이 국물이라니... 한참 민감한 고3때인데다 수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애라 그런지 "난 왜 이렇게 재수없는 거야!"하고 우앙~ 우는데, 뭐 할 말이 있어야지. (다른 친구는 그런걸로 우는 게 웃겨서 배꼽 잡고. 그 친구는 친구가 웃는다고 더 울고. 아주 난리 법석이었음)

아무튼 난 왜 자꾸 그 생각이 나는지.

우연으로 시작한 사건이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커져가듯 나로 하여금 잊혀진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괜찮은 고전 추리소설이다. 이 번역본 초판년도가 무려 1977년이라는데(헉),  더 빨리 읽었으면 훨씬 재미있었겠지만, 더 늦지 않게 읽어서 다행이다. 다음은 <환상의 여인>. (근데 번역본이 왜 이렇게 많아? 고르기 힘들어. 끙 -_-;)


덧,
1. 맞춤법 오류 발견
이래뵈도(X) → 이래ˇ봬도(O) p.56

어제 읽은 책에 이어 연달아 틀려주시니, 순간 내가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건가 싶었다. 다행히 그건 아니고.
과연, 사전에도 틀린 보기가 나올 만큼 자주 틀리는 맞춤법이 맞구나 싶다.;
비슷한 용례로, 뵈요(X) → 뵈어요 혹은 봬요(O)

2. 제목은 언제봐도 참 독특하다. 읽고나니 더 독특해.
참고로 원제는 RENDEZVOUS IN BLACK.

3. 요정도 책 크기 사랑한다.(세로 20cm가량)
해문 문고본보다는 조금 크지만 이 정도면 손에도 잘 잡히고, 가방에도 쏙쏙 들어가고.
우리나라는 적정 수요가 못 돼서 문고본 시장이 생길려다 망했지만, 그래도 요런 책들 보면 문고본 시장이 좀 활성화되면 좋겠다 싶긴 하다. 하지만 출판계 사정 알면 암담-_-;
2009/06/07 12:44 2009/06/07 12:44
- 다시 대학에 가서 과를 정한다면?
1지망. 문예창작학과
2지망. 문헌정보학과

- 그 전에 고등학교에서 문/이과를 다시 정한다면?
무조건 이과 간다.

- 대학원에 가게 된다면?
언론학을 전공하고 싶다.


뭐냐? 이 일관성 없는 소망들은? -_-
2009/06/06 14:42 2009/06/06 14:42
도쿄밴드왜건
쇼지 유키야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그 시절 많은 눈물과 웃음을 거실에 가져다준 텔레비전 드라마에"

책 말미에 쓰인 헌사에서 알 수 있듯 홈드라마 같은 책이다. 메이지 시대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헌책방을 무대로 가족 4대에게 벌어지는 소소한 에피소드가 주내용이다. '도쿄밴드왜건'은 이 헌책방의 이름. 특이한 것은 3대째 주인이자 현 주인 홋타 칸이치(79세)의 부인 홋타 사치가 영혼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런 사치 할머니의 시선으로 자식, 손주, 증손주의 이야기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맞춰 그려진다. '도쿄밴드왜건'이란 이름의 유래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그저 가볍게 유추할 뿐인데, 이 특이한 이름의 간판이 처음 거릴 때도 사람들은 특이하다고 입을 모았단다. 옛날 간판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젊은이가 간판을 올려다보며 "건왜드밴쿄도?"하고 중얼거린 적도 있다는 얘기에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런 적 있는데. :-)

홈드라마답게 자극적인 내용 따위 없다. 일상의 익숙한 풍경이 매일 펼쳐지고, 다만 4대라는 대가족이 모여살다보니 늘 시끌벅적할 뿐이다. 계절마다 사건·사고가 벌어지지만 그야말로 '에피소드'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라 근심, 고뇌라기보다 오히려 적절한 활력소가 된다. 약간의 미스터리는 양념. 그 왁자지껄한 모습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는 역시 가족이어서일까. '둥글게 둥글게'가 모토인 평화주의자들의 이야기는 너무 도덕적이라 때로 지루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한거지, 하고 내심 부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대도시의 편리함과 스릴을 만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골의 느긋함과 정서를 동경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마음에 들었던 건 '헌책방'이 무대로 쓰인다는 점인데, 단순한 장치로만이 아니라 헌책방을 경영하는 사람들에게서 묻어나오는 정취 같은 게 느껴져서 좋았다. 일본도 요즘은 가업을 중시하는 풍조가 많이 사라지긴 했다지만 아직은 곳곳에 이런 가게들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거의 1세기 가깝게 내려오는 가게의 모습은 헌책방에 대한 로망이 있는 나로서는 신기하고 부러울 수 밖에. 이런 가게라면 선대의 영혼이 남아 수호신처럼 보호해주거나 지켜보는 것도 왠지 망상만은 아닐 것 같다.

개개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행동할 때는 가족 단위가 된다는 것이 이런 대가족 홈드라마의 특징이자 한계. 절연한 '아미'의 친정 어른을 찾아가뵙자며 칸이치 영감의 명령 아래 가족 전체가 부산하게 예복을 갈아입는 장면은 무척 전형적이었다. 그나저나 아오와 스즈미의 결혼이 아무런 방해 없이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게 좀 놀라웠는데, 따지고 보면 족보가 엄청 꼬이는 거 아닌가. 건너건너 반쪽짜리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친척인데, 저렇게 아무 거리낌 없이 결혼이 성사되다니 한국식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일본은 사촌간에도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더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가 싶기도 하고.-_-

두세 시간이면 슥삭,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따뜻한 책이다. 단, 평소에 착한 가족 드라마 분위기를 싫어한다면 별로 권하지 않는다. 이후로 속편 격인 <쉬 러브스 유>도 나왔다던데, 칸이치 영감의 장남이자 왕년의 록커, 금발의 가나토가 늘상 왜치는 '러브'는 여전히 유효한가보다. 기회되면  읽어봐야겠다.


덧,
1. 맞춤법 오류 발견
이래 뵈도(X) → 이래 봬도(O) p.190, p.303


2. 기억에 남는 문구
아오는 아침밥을 먹고 잠시 쉬고는 곧장 돗자리와 대발을 꺼내 와서 마당에 깔았어요. 콘이 그 위에 그늘막을 치고, 책을 꺼내 와 그늘에서 말리려는 겁니다. 아주 낡은 책이 아니라면 그대로 한동안 내버려둬도 괜찮지만 개중에는 아주 오래된 값비싼 책도 있어요. 그런 책은 바람을 너무 많이 쐬어도 못쓰게 되니까 적당히 조절해주어야 한답니다. 별로 값나가지 않는 헌책은 대발 위에 그냥 툭툭 던져놓고, 값나가는 고서는 흰 면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다루지요. 앉은뱅이 테이블에 흰 천을 덮고 거기에 책을 가만가만 놓는 거예요. 그 다음 한 장 한 장 책장을 천천히 넘기면서 안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볍게 바람을 쐬어주지요. p.128~129 : 헌책방의 일과가 자연스럽게 드러나서 좋다.

"마치 소녀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어요."
그 기분 잘 알지요. 여자는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그런 기분을 잊고 싶지 않은 법이거든요. p.263 : 동감.

"잊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이렇게 여길 다니고 있잖습니까. 책은 한 권 한 권 제 주인을 찾아가는 법이다. 돈을 마구 써서 사고팔고 해봤자 거기에 책에 대한 애정은 없다. 책은 물건과 다르다." p.326 : 후지시마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칸이치 영감의 책에 대한 마인드. 책을 읽는 행위나 책 자체를 유별나게 신성시하는 것은 싫지만, 수천 년 이상 내려오는 책이란 매체가 가진 고유의 가치는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물건과는 다른 것이다.


3. 같이 읽으면 좋은 책들



미우라 시온, <월어>
교고쿠 나츠히코 <우부메의 여름>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두 책 모두 헌책방(고서점)을 무대로 한다.
각각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그려지는 이미지가 판이하게 다르다.

<도쿄밴드왜건>의 '도쿄밴드왜건'은 따뜻하고,
<월어>에 나오는 '무궁당'은 시원하고,
<우부메의 여름>에 나오는 '교고쿠도'는 이(異)세계 같다.

작품 성격따라 나뉘는 이미지이기이기도 하다.
2009/06/06 12:36 2009/06/06 12:36




여행기나 여행에세이를 읽으면 대체로 마음이 들뜬다. 어디어디를 돌아다니며 어떤 경험을 했고 무엇을 느꼈노라, 하는 글들을 사진과 곁들여 읽다보면 당장이라도 떠나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어디든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발바리(...) 기질도 한몫하겠지만, 여행이란 모름지기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는 법이다. 그리 거창하고 긴 여행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한번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관광이 아닌 여행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라서 늘 어딘론가 떠나는 꿈을 꾸며 이것저것 계획을 세웠다 무너뜨렸다 한다. 아직 혼자서는 제대로 된 여행 한번 해본 적 없는 겁쟁이일 뿐이지만……. 그런데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을 읽고나서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벅찬 감동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위안을 얻은 것 마냥 편안하다는 느낌이 먼저였다. 아마 '산티아고'의 특성상 일반적인 여행보다는 순례의 느낌을 더 많이 전해주어서일 게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 책 위에 손 얹고 명상에 잠긴 책은 참 오랜만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우리말로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뜻의 이 길은 도보순례로 유명한 길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는데 그중 프랑스 남부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에 이르는 '프랑스 길'이 가장 유명하다. 스페인어 '카미노(camino)'는 그냥 '길'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지만 '프랑스 길'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카미노(Camino)'가 '프랑스 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인다."(p.20)

고 한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은 저자가 이 카미노를 걸으면서 만난 사람들과 끊임없이 떠오르고 사라진, 혹은 새겨진 생각들의 기록이다.

극심한 혼란함과 슬픔을 벗어나고자 도피하듯 떠난 여행이라고 했다. 나를 찾는 여정이 아니라 나로부터 달아다니기 위한 일종의 도주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나에게는 sanna라는 필명으로 더 익숙한 저자가 조그마한 등산화 사진 한장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떠났을 때까지만 해도 흔한 배낭여행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 서두에 '나의 동생 김인배에게'라는 문구를 보았을 때도 별 생각이 없었건만 사실은 사연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불쑥 미안한 마음과 함께 숙연하고 진지해졌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마운틴 폴에 의지해 하염없이 산티아고로 걷는 저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보이지 않는 동행이 되어 천천히 책을 읽어나갔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동으로 다가왔던 건, 바로 '사람들'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산티아고 가는 길' 위에는 사람이 있었다. 모든 여행은 깨달음이 뒤따르지만, 그 깨달음에는 자연과 함께 늘 사람이 있다는 걸 나는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별것 아닌 사실이 이토록 뭉클하게 다가오다니 새삼 가슴이 벅찼다. 카미노를 걸으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수 만큼 다양했다. 글의 초반, 타인에 대해 이리저리 널뛰는 저자의 복잡한 감정이 마치 나인양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짜증도 났지만,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마음이 열리는 걸 보며 나 역시 치유를 얻고 안식을 얻는 느낌이 들어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런가 하면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이란 제목처럼 혼자일 때 비로소 정리하고, 토해낼 수 있는 생각들도 존재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마침내 크루스 데 페로에서 동생의 사진을 묻으며 터뜨린 울음 앞에서는 나도 따라 울 수 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워서 훌쩍훌쩍 울어서인지 그 부분을 넘기고 나자 잠이 쏟아졌다. 책갈피를 꽂아놓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내가 카미노를 걷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길이 어린 시절 내가 무척 좋아했던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뒷산 가는 길'과 닮아있어 나는 또 그리움에 훌쩍훌쩍 울었나보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눈 주위로 눈물자국이 길게 말라 붙어있었다.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아주 많은 책이었다. 특히 '머리 냄새 나는 아이'나 일마즈가 얘기해 준 산티아고 전설, 그리고 아름다움을 들이마시는 인디언들의 처방법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예쁜 이야기다. 할머니가 되면 (아니 되기 전에라도) 어린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 하듯 들려주고 싶다. 카미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말, 저자의 생각, 인용한 구절구절과 덧붙여진 해석들 모두 기억하고 싶은 것 투성이다. 도망치듯 떠났고 순례의 정신이라기보다 그저 걷고 싶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저자는 순례자의 임무를 마친 셈이며, 덕분에 독자로서도 순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평화를 조금이나마 느껴서 참 고마운 책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책을 덮으며 언젠가는 카미노를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안다. 아직은 마지막 비상구로 남겨두고 싶다. 지금보다 더 절박해지면, 혹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가 오면 오직 배낭 하나에 나를 압축해 넣고 카미노를 걸어보고 싶다. 하염없이 그 길을. 그때까지 이 말을 아껴놓는다. 부엔 카미노(buen camino)!



덧,
1. sanna님이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 몇 장과 짧은 글을 올려셨을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이 10초는 고정될 정도로 반한 사진이 있다. 푸른 들판 위로 길이 나 있고, 지평선 위에 그림처럼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사진이었다.

메세타 평원의 지평선 위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메세타 평원의 지평선 위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p.118~119)


바로 이 사진인데, 거의 다 왔다 싶으면 뒤로 물러나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 같았다고 했다. 이 사진이 책에 크게 담겨 있어서 정말 좋았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를 저 빛깔이 좋다. 여전히 퐁당 빠져 버릴듯한 사진이다. 이 사진 말고도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본 좋은 사진이 많다.


2. 블로그에 여행기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도중에 책으로 발행될 거라고 해서 은근히 설레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궁금하던 참에 책이 짠- 하고 나왔다.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들어서 기다림이 아무렇지도 않다. 예쁜 글씨체로 내 이름과 함께 정성스럽게 싸인까지 해서 책 보내주신 sanna님, 아니 김희경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
2009/06/05 21:42 2009/06/05 21:42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05
현대문학

박완서 - 거저나 마찬가지
조성기 - 작은 인간
이혜경 - 피아간彼我間
구효서 - 소금가마니
윤대녕 - 탱자
하성란 - 웨하스로 만든 집
이기호 -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김중혁 - 무용지물 박물관無用之物 博物館
정이현 - 그 남자의 리허설
김애란 -달려라, 아비



단편소설이 읽고 싶을 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집.
특별히 땡기는 작가가 없거나 뭘 읽어야될지 모르겠을 땐 이렇게 여러 작가의 작품을 한꺼번에 읽어볼 수 있는 소설집이 제격이다. 알아서 선곡해주는 컴필레이션 앨범과 같달까. 간혹 취향에 맞는 작품이 한 작품도 없을 경우 난감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럴 일은 거의 없다. 최소한 하나는 건지게 돼 있다. 나름대로 현장비평가가 뽑았다는데 독자가 읽어서 하나도 건질 게 없다면 당장 비평가 접어야지.-_- 물론 비평가와 일반독자의 취향 사이에는 늘 일정한 넓이의 강이 흐르지만서도. 반대로 건질 작품이 많다면 의외의 포만감으로 배 통통 두드릴 수 있으니 별로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어쨌거나 2005년 소설집이라 좀 늦었긴 하지만 얼마전에 득템하여 후다닥 읽었다. 재미있었다. 이 중에 이기호, 정이현의 작품은 각각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와 <오늘의 거짓말>에 실려있고,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있는데, 사놓고 안 읽는 바람에 여기서 처음 읽는다. -_-; 그 책들 어느 책장에 쳐박혀 있는지 찾지도 못하겠다. -_ㅠ (도무지 정리가 안 되는 나의 책들;)

개인적으로 조성기의 '작은 인간' 빼고는 다 그럭저럭 취향에 맞고 재미있게 읽었다. '작은 인간'은 아아, 도무지 그 감성을 못 따라가겠다. 남자는 물론 시점이 되는 여자의 생각조차도 와닿지 않았기 때문에 읽는 내내 겉돌고 있다는 느낌 밖에 못 받았다. 액자식 구성으로 그 안에 속한 전족 이야기가 오히려 훨씬 재미있었고 뭘 말하려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노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장치로서 패티시즘을 다루고 있다고 보는데, 하필 '발'이라서 좀 무서웠다. (CSI 생각났음.-_-;)

이혜경의 '피아간'과 구효서의 '소금가마니' 윤대녕의 '탱자'는 묘하게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전통적인 사회에서 당연시되어 오던 가치관의 부조리가 저변에 깔려있다. 특히 '피아간'에서 묘사되는 큰아들의 행태라든가 경은이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소금가마니'에서 드러나는 어머니의 핍박과 희생, '탱자'에서는 고모님의 억눌렸던 젊은 시절 같은 것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서 뒷맛이 어찌나 씁쓸한지. 드라마 소재로도 무던히 쓰인 이 이야기들이 아직도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있는 걸 보면 여전히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 아무리 지리멸렬하게 부대끼는 인생이라지만 마주 대하면 늘 쓸쓸해진다. 그나저나 윤대녕은 '은어낚시통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 내심 놀랐다. 아무래도 최근 소설을 더 읽어봐야할 것 같다.

박완서의 '거저나 마찬가지'는 세태에 대한 풍자가 들어있다. 신랄하지 않고 은근하게 까발리는 게 일품. 소위 386세대에 대한 감사와 증오가 교차되는 심정을 문학적으로 표현했달까. 기억에 남는 작품.

하성란의 '웨하스로 만든 집'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장면 묘사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부실공사로 지어진, 지금은 재개발 붐에 휩쓸려 겨우 버티기만 하는 그 2층 양옥집에 대한 묘사는 내가 한 때 살았던 그 집이 생각나서 눈물이 다 나올 뻔 했다. 그런데 그 비실대는 집에 얽힌 추억은 또 얼마나 질긴지 지금도 생각하면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립다는 게 참 아이러니. 삐걱거리는 바닥 소리가 웨하스 씹을 때 나는 소리 같다는 표현은 정말이지 적확하다.

이기호의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은 아아, 너무나 이기호스러워서 웃음이 다 났다. 하여간 이 작가, 재치있다니까.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이렇게 발랄하게 표현해낸다는 건 정말 재주다. 제목도 어찌나 기발한지. 거의 환상문학처럼 펼쳐지는 내용은 읽어나갈수록 살짝 상식에 혼란이 올 정도. 흙은 정말 먹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꽃도 식용이 있는데, 흙이라고 없을까... 뭐 이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은 감각에 대한 소설이다. 오감의 어느 하나를 배제한 채 대신 상상력을 곁들여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사물을 대한다라...... 사실 문학의 경우도 시각적으로 직접 다가오는 게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야만 전달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 모든 창조물이 다 그렇구나. 결국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 건가?

정이현의 '그 남자의 리허설'은 남자의 열등감과 그로 인한 피해의식과 결핍을 냄새(후각)로 표현해내는 게 탁월하다. 냄새에 대한 묘사는 실제와 망상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불안한 남자의 심리가 어느 지경에 다다랐는지 생생하게 전달한다. 깔끔한 문장은 이 소설이 필요 이상 질퍽해지지 않는데 일조. 그래서 더 연민이 느껴지는 그 남자의 리허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읽고나서 좀 웃었다. 이 '아비'가 그 '아비'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난 사람 이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대.;;; 예쁜 여자 아이 이름이라고 생각한 건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이게 다 알록달록한 단행본 표지 때문이니라. 아무튼 예상과 다른 내용에 짜증과 유쾌함을 동시에 경험한 희한한 소설이었다. 난 '아비'가 못마땅한데 우리 주인공은 어쩜 그리 긍정적인지 말이야. 제목마저 '달려라, 아비'하고 응원조이지 않은가. 이런 착한 아이 같으니라고. 난 그런 주인공과 엄마를 응원할 테다. 무거운 내용을 가볍고 신선하게 진공포장하며 거기에 유쾌한 리본까지 묶어버린 김애란의 문체를 보며 왜 요즘 잘 팔리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평작 이상은 된다. 비교대상이 없어서 별점은 생략하지만 3개 이상은 거뜬하다고 본다.
다른 연도 소설집도 착착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나서 연도별로 나만의 순위를 매겨봐야지.
2009/06/05 21:16 2009/06/05 21:16
한희정 - 끈 EP
파스텔뮤직 (Pastel Music)

수록곡

1. acoustic breath
2. 러브레터
3. 끈
4. 오늘만
5. 솜사탕 손에 핀 아이
6. 멜로디로 남아 (feat. 김종완 from 넬)
7. 끝




5월 중순에 각 스트리밍 사이트에  '솜사탕 손에 핀 아이'가 선공개 됐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때까지 나는 작년 7월에 발매된 한희정의 첫 솔로 앨범 <너의 다큐멘트>를 해가 넘어가도 질리지 않고 듣고 있었기 때문에 후속 앨범이나 싱글에 대해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왠지 1년은 훌쩍 지나야 다음 앨범이 나올 거라 생각해서 여름이나 가을쯤 돼야 슬슬 2집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만 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한마디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EP 발매 소식이라니! 꺅꺅 소리를 질러댈 정도로 기뻤다. 28일이 정식 발매일이지만 선공개가 어디냐, 선공개는 들어줘야 제맛. 설레는 맘을 안고 조심조심 들어보았는데…… '아이 달콤하여라'. 어린 날의 동화 같은 노래였다. 쓸쓸하게 옛날을 추억하는 어른의 노래가 아니라 고민의 흔적이 있긴 하지만 베시시 웃으며 수줍게 옛기억을 떠올리는 소녀의 노래였다. 제목도 '솜사탕 손에 핀 아이'란다. 이 예쁜 문구를 보라. 보송보송한 솜사탕의 달콤함이 손에서 혀로 스미는 느낌이 들 만큼 예쁜 제목이다. 솜사탕과 손 사이에 조사 '이'가 빠지면서 시적인 느낌도 물씬 풍긴다. 의도한 거겠지? :-) 얼른 CD로 들어보고 싶다. (하지만 6월 2일로 발매일 연기! 으윽)

왜 이렇게 늦게 한희정을 알게 되었을까. 지난 해 <너의 다큐멘트>를 들으며 수없이 했던 생각이다. <푸른 새벽>을 찾아 듣고, <더더>의 3, 4집을 들으면서는 억울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왜, 왜, 난 이 목소리들을 흘려들었단 말인가. 그렇다. 분명 듣기는 들었는데, 담아두지 않고 흘려버렸던 것이다.(머리 콩콩!) 그야 나의 얇디 얇았던 음악 취향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괜히 심술이 났다. 옛날부터 한희정 노래 들었던 사람들은 좋겠네, 부러워부러워. 그렇지만…… 늦게라도 알게 되어 내 귀가 즐거워졌으니 그래도 인연은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CD가 왔다. 책상 위에서 날 반기는 택배상자. 두근두근 테이프를 뜯어보니. 같이 주문한 <남과 여... 그리고 이야기>와 함께 뽁뽁이 비닐에 곱게 싸여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에헤헤. 혹시 상처가 날 새라 조심조심 비닐을 뜯었다. 근데 우씨, CD 케이스 모서리가 약간 깨져있었다. ㅠ_ㅠ 포장 문제라기보다 원래 불량인 것 같았다. 우엥. 아니야, 뭐 괜찮아, 봐줄 수 있어, CD만 무사하면 됐지. 후다닥 꺼내어 CDP에 넣고 삑삑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는다. 사실 발매일이 밀리긴 했지만 28일에 온라인에는 전곡 공개가 되었다. 참을성 없는 나는 이미 노래를 다 들어보긴 했지만, 그래도 CD로 듣는 건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느낌이다. 음질 문제를 떠나 아날로그에서 느끼는 향수 같은 거랄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CD도 LP나 테이프에 비하면 상당한 디지털 매체인데 어느새 아날로그로 생각될 만큼 옛스러운 매체가 되어버렸다.



그럼 슬슬 노래 이야기로 넘어가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지저귀는 새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기타를 들고 자세를 잡는 소리, 노래 시작 전 작게 기합을 넣는 소리, 그리고 딩가딩가 하는 기타소리와 함께 첫 곡인 'Acoustic breath'가 시작된다. 제목 그대로 어쿠스틱의 분위기와 감성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도입부다. 기타줄 사이로 음을 타는 예쁜 손가락과 마이크 앞에서 눈을 감은 채 가만가만 노래하는 한희정이 그려진다. 어쩜, 이렇게 예쁜 목소리를 가졌는지. 넘실대는 감수성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해주는 기막힌 목소리를 가졌다 한희정은. 그것을 유감없이 발휘해내는 'Acoustic breath'는 이어지는 노래들의 첫 곡으로 손색이 없다. (아니 어디에 끼어들어가도 좋을 거야.) 그리고 넘어가는 두 번째 곡 '러브레터'는 가사가 먼저 귀에 들어온다. 멜로디 없이 가사만 봐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말들. 정말이지 이 죽일 놈의 감수성!!!!! 이별 후 슬픔에 침잠하지 않으면서 독하게 발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덤덤하지도 않게 아린 마음을 표현하는 탁월한 글귀다. 귓볼에 걸어둔 노래소리, 팔랑이는 속삭임이라니... 그렇게 한희정의 목소리는 내 귀에서 팔랑팔랑 한다. 세 번째 곡이자 EP타이틀과 같은 제목인 '끈'으로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한희정이 하고 싶은 말이 드러난다. 가만히 들어보면 이번 EP에 수록된 일곱 곡의 노래들은 하나의 주제에 걸쳐 있는데 그것은 혹시 너와 나를 이어주는 무형의 어떤 것이 아닐까. 한희정은 그것을 '끈'이라고 표현한다. 이어져 있던 끈이 끊어지든, 아니면 끊어진 끈을 다시 묶어 잇든, 곧 끊어질 듯 위태위태하든 어쨌든 너와 나 사이에는 끈이 있다. 다소 서글프게 노래하지만 끈이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네 번째 곡 '오늘만'은 아주 짧은 곡이다. 흔히 interlude에 해당하는 곡이 아닐까 싶은데, 그전까지 이끌어온 분위기를 마무리 하면서 타이틀인 '솜사탕 손에 핀 아이'로 부드럽게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솜사탕 손에 핀 아이'는 곡으로만 놓고보면 <끈>이라는 EP내에서 조금 튀는 곡이다. 약간의 템포가 더해지고, 음도 조금 더 통통 튄다. 가사도 앞선 곡들에 비해 밝다. 그래서 분위기를 환기해주는 곡이기도 하다. 그런 곡이 갑자기 튀어나와 어색해지지 않게 '오늘만'이 보완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구는 둥글고 밤은 여전히도 아름다우니 오늘까지만 모른척 해달라는 가사는 문학적인 그녀의 노래답다. '솜사탕 손에 핀 아이'를 지나면 '멜로디로 남아'가 나온다. 아주 담백하게 시작되는 이 곡은 넬의 김종완의 보컬이 섞이면서 곡 전체가 풍성해진다. 한희정 혼자서는 나긋나긋하지만 피쳐링이 더해지면서 힘을 받는다. 어쩐지 <너의 다큐멘트>나 푸른새벽의 앨범이 생각나는 노래다. 그 앨범에 들어가도 위화감이 없을 노래. 왜인지는 음, 잘 모르겠다.; 드디어 마지막 곡인 '끝'은 제목마저 '끝'이다. '끈'을 이야기하며 '끝'으 마무리를 하는 센스. 정말 좋다니까! >_<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은 맨 마지막 가사인 '꿈이었네' 부분인데, 마지막 '네'에 스타카토를 찍으면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부분이 좋다. 그렇지만 다시 'Acoustic breath'로 돌아가도 덜커덕거리지 않는 곡. 그래서 end가 아니라 and여도 좋을 곡이다. :-)

한희정의 이번 EP는 전체적으로 <너의 다큐멘트>를 이어가면서도 앞으로 나올 2집의 포석이라는 듯 살짝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EP의 음률이 조금 더 둥실 떠오르는 느낌인데, 그래서인지 쓸쓸한 가사를 노래하지만 그 모두를 인정하고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EP인 만큼 곡 수가 정규 앨범보다 적다는 것과 약간은 소품집 분위기가 나는 디자인도 그런 느낌에 한몫을 한다. 에메랄드 그린이 전체를 덮고 그 위에 눈을 감고 엎드린 한희정이 하얀 실타래 쥐고 있다. 실타래에서 풀려나온 끈들은 뒷장으로 이어지고 그 끈을 감고 있는 손도 보인다. 마지막으로 한희정의 옆모습과 함께 손가락 끝에 묶인 끈들이 이번 EP의 느낌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대변한다. 참 아기자기하다. 미니앨범 혹은 EP가 가지는 속성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군더더기 없는 CD프린팅은 지난 앨범과 맞추기 위한 걸까? 파스텔톤 에메랄드 그린이 한가득!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햇살처럼 나른하고 편안하다.

더더의 한희정과 푸른새벽의 한희정, 그리고 솔로로서의 한희정은 그 색깔이 참 많이 다르다. 보통은 중첩되는 이미지에 점점 질리기 마련인데, 어쩜 이렇게 제각각의 매력을 뽐내주시는지 새삼 놀랍다. 내가 늦게서야 한희정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각 그룹과 솔로로서의 음악색이 달라서일까? 아니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같은 시기가 아니라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각각의 매력을 분출한 거라고. 음, 그럴 수도.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일찍 한희정을 알지 못한 게 다시금 안타깝다. 아아,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한희정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나의 모든 감상이 다 사족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난 한희정의 감성이 정말 좋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 그럴 것 같다. 이건 뒤늦게 한희정을 알게 되어 얻는 효과 같은 거? 헤에, 일장일단이려나. 어쨌든 지금은…… 그저 좋을 뿐이다.  :-)



덧,
1. 초도한정으로 B-Friend 팔찌를 증정하고 있다. 앨범 하나 사면 자동으로 결식 아동 기부도 하게 되는 것이다.
좋구나~! :)
2. '솜사탕 손에 핀 아이'는 신곡이 아니었구나……. 작년 SPACE 공감에서 라이브로 불렀다! 'ㅁ'
다른 곡들도 공연에서 먼저 선보인 거구나……. 음. 모르는 게 많군. 나는 계속 뒷북. -_-
2009/06/04 20:13 2009/06/0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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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년 만에 한 후배를 만났다. 무슨 얘기 끝에 내가 물었다.

"너 혹시 푸른새벽 알아?"
"한희정!!!!"
"어? 알아?"
"예뻐요!"
"맞아, 예뻐!! ㅠㅠ 목소리도 좋아!!"
"그쵸?"
"갑자기 더더 노래 듣고 싶다."
"푸른 새벽으로 시작했는데 더더가 듣고 싶다니…;"
"내가 더더 앨범은 안 가지고 있거든. 그래서 더 듣고 싶은 건가봐."


더더 4집은 정말 명반이다.
나도 CD로 갖고 싶다.
아쉬운 맘에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지만, 그래도 CD가 제맛인데.
에이 뒷북쟁이. 뒤늦게 알게 된 건 꼭 일찍 품절되더라. -_-

어쨌든 한희정 EP는 이미 주문했음.
원래 28일 출시예정이었는데, 발매일이 밀려서 2일날 나온단다.
난  참을 성 없어.
그냥 스트리밍으로 미리 듣고 있다. 좋다, 좋아!! ㅠㅠ
지방에서도 쇼케이스를 해달라!!!


2.

이런 걸 두고 종합선물세트라고 하는 거다.
이런 건 사야돼!


3.

아닛, 이 스위트한 표지는 뭐지?
패턴은 <핑거스미스>랑 맞춘 것 같은데, 핑크라 그런지 훨씬 앙증맞다. >_<
그건 그렇고, 드디어 나왔구나. 으하하.
<핑거스미스> 나오고 나서 연달아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거의 잊고 지냈다.
이미 드라마를 봐버려서 전체적인 내용은 알지만, 소설은 또 소설만의 재미가 있는 법이지.
700페이지가 넘었던 <핑거스미스>에 비해 200페이지 정도 적다. 부담없구만!


4.

원빈♥
근데 혜자마님의 연기가 더 궁금해.
매혹적이라는 오프닝도.
곧 보러 가야지.


허억! 방금 약간 스포일러를 밟았는데, 무려 김.기.덕이 언급되었다.
아, 무서워!;;;;;;
2009/05/31 17:20 2009/05/31 17:20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난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여자가 좋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나름대로 확고한 가치관도 가지고 있고, 그러면서도 새로 시작할 수 있고.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잖아." p.280

왜 서른한 살인가에 대해 -전부는 아니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작가의 생각을 드러낸 대사일지도 모르겠다. 이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아이러니지만, 어쨌든 서른이 아니고 서른한 살, 그 경계선이 가지는 가장 긍정적인 의미가 아닐까. 나이에 대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나가는 시간 -우리가 청춘이라 부르는 그것-에 대해 아쉬워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쉽지만 흘려보낼 수 밖에 없기에, 잠시 멈춰 현재를 들여다 볼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그래야 다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길 테니까.

서른한 편의 단편이 차곡차곡 담겨있는 <내 나이 서른 하나>는 정의하기 쉽지는 않은 소설이다. 각각의 단편은 때로는 나른하고, 때로는 열정적이고, 때로는 담백하다. 그래서 주욱 이어서 읽기보다는 텀을 두고 읽는 것이 몇 배는 와닿는다. 각 단편의 공통점이라면 여자, 갓 서른을 넘긴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일 텐데, 그래서 남자보다는 여자가, 이왕이면 서른 근처의 나이라면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서른 하나라는 나이를 유난히 강조하는 번역본의 제목은 조금 씁쓸하다. 원서의 제목이 First Priority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누구나 살면서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자신만의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다. 여태 신경쓰지 않았지만 문득 그런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걸 작가는 서른한 살의 여자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완전과 완전의 틈새에 있는 서른한 살의 여자.

나만의 우선순위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런게 있긴 한가, 했는데 나에게도 있긴 하더라. 피식 웃음이 났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줬다는 게 이 책의 미덕일 것이다. 일본소설의 특징인 듯 무심하게 끝내버리는 결말도 이번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때는 그 쿨함이 못 견디게 싫었는데, 한동안 거리를 두다보니 오히려 신선하다. 어차피 구구절절 설명하려 할 수록 공감에서는 멀어지는 내용이라서 그런가. 그렇다고 냉소적이지도 않아서 편하게 볼 수 있었다. 가끔 겹치는 캐릭터가 있고, 비슷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서른한 살 여자의 다양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참 각양각색이다.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평도 있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서른 하나의 여자를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나이잖아. 생활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를 다시금 돌아볼 수있는 왠지 비현실적인 나이. 그런 면에서 얼마전에 읽은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세>가 생각나기도 했다.

야마모토 후미오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연애중독(개정판 러브홀릭)>보다는 재미면에서 약하지만, 작가의 색은 잘 드러난 것 같다. 작가 특유의 여성 심리묘사는 날카롭지는 않지만, 의외로 콕 찔러주는 맛이 있어서 좋다. 발랄함보다는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책이라 조용한 곳에서 커피 한잔 하면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화나거나 우울한 날 읽으면 괜히 시비걸고 싶은 기분이 될지 모르니까 피하는 게 좋다.

  내 나이 서른하나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연애중독>, <플라나리아>의 작가 야마모토 후미오가 '서른한 살 여자'를 주인공으로 쓴 서른한 편의 이야기. 삶이 한없이 무료한 여자, 일 년간 섹스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여자, 직장에서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여자 등 '삼십대에 막 발을 담근 여성들의 삶'이라는 코드로 묶인 소설집이다. 각각의 작품은 일반적인 단편소설보다 길이가 짧으며, 섬세하고 날렵하고 리듬감 있다.
2009/05/31 16:23 2009/05/31 16:23
좌부녀
모치즈키 미네타로 지음
세주문화


<드레곤 헤드>의 작가, 모치즈키 미네타로가 선사하는 초특급 공포 미스터리.
<좌부녀>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단 1권으로 발행부수 32만 부를 넘어서는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다.



얼마전에 중고샵에서 득템한 만화. 예전에 '웹진 블라블라'였나, 아무튼 이 만화에 대한 리뷰를 보고 굉장히 읽고 싶었던 건데, 품절돼서 못 사고 있다가 이번에 구해서 읽었다. '블라블라'가 아직 살아있던 게 2005년 경이라 시간이 많이 흐른 관계로 리뷰 내용은 기억이 안나지만 어쨌든 표지만 봐도 은근한 공포가 느껴지기에 내심 기대되는 만화였다. <좌부녀>는 일본어로 座敷女(ざしきおんな, 자시키온나)니까 굳이 뜻풀이를 하자면 '객실녀'쯤 된다. 대체 무슨 의미로 붙여진 제목인지 감이 안 잡혔는데, 만화를 읽다보니 왜 이런 제목이 붙었는지 이해가 간다.

곧 폭우가 쏟아질 듯한 어느날 밤,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히로시의 귀에 벨 소리가 들린다. 옆방인가? 한 번, 두 번, 세번, 네 번……. 신경이 쓰여 현관문에 귀를 바짝대고 들어보니 "열어줘…."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옆집 사는 놈 여자가 찾아 올 타입이 아니던데……. 끈질긴 벨소리에 대한 짜증과 어떤 여자인가 하는 호기심에 문을 연 히로시의 눈이 커진다. 딱 봐도 호감과는 거리가 먼 외모와 옷차림,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 등 이 모든게 어쩐지 스산한 분위기를 발산해내는 여자(사치코)가 옆방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굳이 옆집 동향을 세세히 살피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밤중에 옆집의 벨소리가 끊임없이 울린다면 짜증이 나서라도 당연히 문을 열어 누군지 확인하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예상치도 못한 결과물로 자신을 괴롭힌다면 글쎄, 그때부터 그것은 공포가 된다.

스토커가 무서운 건 '광적인 집착'과 함께 감히 그 행동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절절한 구애와 악질적인 스토킹의 차이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유무일 것이다. 사치코의 행동에는 배려가 없다. 하물며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면? 공포의 크기는 더욱 커질 것이다. 보통 스토킹이라 하면 애정이 지나쳐서 집착이 된 나머지 관심의 대상을 병적으로 쫓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스토커가 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최소한 애정에서 집착으로 변화할 시간은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좌부녀>의 사치코는 그런 기본적인 과정이란 게 없다. 전개 과정 없이 발단에서 바로 절정으로 넘어간다. 도무지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납득하기 힘든 것들이다. 심지어 가라테 유단자에게 급소를 얻어맞아도 '아앙,아앙' 울면서(!) 달려드는 공격성은 오히려 때리는 사람이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웬만한 남자보다 훨씬 큰 키에 올이 나간 스타킹, 지저분한 트렌치 코트,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종이 가방을 주렁주렁(...) 손에 든 채 치렁치렁한 긴 머리 휘날리며 미친듯이 쫓아오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섬뜩해지지 않을까. (아, 무서웠어! ㅠㅠ) 선혈이 난무하거나 사람이 죽어나가는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심장이 죄어드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도 당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앞서 말했듯이 사치코의 행위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 정확히 말하면 사치코 외에는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일에 대해 최소한의 예방조치도 취할 수가 없다. 마치 '묻지마 살인'처럼 누구라도 운 나쁘면 걸려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좌부녀>는 굉장히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공포를 보여준다. '사치코'의 개인사는 철저히 차단한 채 -암시적인 대사를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유추할 수 없다- 그저 행위만을 보여줌으로써  현대인의 숨겨진 공포를 끄집어낸다. 단지 누가 벨을 울리는지 확인만 하려 했을 뿐인데, 그로 말미암아 죽음의 위협까지 느끼게 된다는 설정은 나 외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현대인의 두려움을 극단적인 픽션으로 표현해 낸 것이 아닐까. 특히 마지막에 야마모토가 등장하며 보여주는  반전 아닌 반전은 순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압권이었다. 그저 문을 열었을 뿐인데, 단지 그것 뿐인데……. <좌부녀>가 가진 공포의 본질이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렇게 야마모토와 히로시, 그리고 사치코의 일화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풍설이 되고, 늘 그렇듯 여러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과장과 축소, 변질이 거듭된다. 이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괴담으로 정착되는 순간, 사치코는 사람들의 일상을 알게 모르게 침범하며 도시전설이 되어 간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이 대기중에 부유하는 이야기. <좌부녀>가 무섭지 않다고? 이 만화를 읽고 난 뒤, 옆집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잠깐이라도 망설이게 된다면 <좌부녀>의 공포는 유효하다. 난 아마 한동안은 그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든다.



덧,
1. 사치코의 이미지는 사다코(링)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름마저 비슷하잖아.
2. 왠지 이토준지가 생각나는 그림. 그래서 더 무서웠을지도.
3. 생각해보니까 하는 짓은 <검은 집>의 사치코다. 이름은 아예 똑같다. 무섭구만.


앗, misha 님의 제보로 당시에 제가 보았던 <좌부녀> 관련글과 리뷰를 링크합니다.
특히 <넌 휴가가니? 난 만화책 본다>는 여름이 다가오니 한번 읽어보고 참고하셔도 좋을 듯.

넌 휴가가니? 난 만화책 본다 - misha
좌부녀(座敷女)-당신의 집 대문 앞에는 그녀가 없나요 - misha
2009/05/31 12:06 2009/05/3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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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銀漁
January 9, 1993 미아리통신
은어낚시통신
불귀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국화 옆에서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카메라 옵스큐라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
눈과 화살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이 읽고 싶어 수소문했을 땐, 이미 책은 절판된지 오래. 이런 일이 한두 번이겠냐만 무릇 물건이든 사람이든 가질 수 없을 때 더욱 원하게 되는 법이라 쉽게 포기가 안됐다. 그래서 오프라인도 훑어보고, 헌책방도 훑어봤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아 애가 탔다. 이럴 땐 그저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는 내 손에 들어올꺼야!'라고 생각하는 게 상책이다. 사람 뿐 아니라 물건도 인연은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은어낚시통신>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지 근 6개월 만에 결국 이 책을 구했다. 그것도 싸고 새책 같은 걸로.(럭키!) 

윤대녕은 90년대 초반에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지만 내가 그를 알게된 건 밀레니엄이 코앞이었던 때였다. 필수교양으로 '문학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해야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이 다니던 친구와 떨어져 나 혼자 수업을 들어야 했다. 땡땡이를 치지 않는 이상 자연히 수업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때 교수님이 텍스트로 삼았던 문학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은어낚시통신'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스무 살의 난 '은어낚시통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표면적인 내용도 그렇지만 그 내용이 가지는 의미라는 게 좀처럼 와닿지 않았다. 어렵고 난해해서 내 독해력이 이것 밖에 안되나 좌절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이해되지 못한 채 흘려버린 '은어낚시통신'인데, 참 이상도 하지. 졸업을 하고 나니까 종종 생각이 나는 거다. 지금이라면 작가가 뭘 말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게 벌써 몇 년째인데, 얼마전부터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읽고 싶어져서 급기야 책 찾아 삼만리에 나섰다는 이야기. 사실 책 구하는 몇 개월 사이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했었는데, 아무래도 이 책은 며칠 빌려 읽고 탁 털어버리엔 아직도 그리 만만하진 않더라. 나로서는 결국 사서 읽어야 할 책이라는 얘기다.

새로이 읽다보니 문득 하루키가 떠올랐다. (예전엔 못 느꼈던 이유는 내가 하루키를 뒤늦게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윤대녕과 하루키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글이 꽤 보였다. 하루키 열풍이 불어닥친 90년대 문단에서는 하루키의 문체와 분위기에 영향받은(혹은 흉내낸) 작가에 대해 말이 제법 많았던 모양인데, 그 중 한 명이 윤대녕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과연! 두 작가 모두 현학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글을 써내는 타입이라 비교될 만도 하다. 더욱이 이 책은 윤대녕의 첫 번째 단편집이라 대부분 초기작품이니 내가 그렇게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어떤 독자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기엔 아직 이른 시기니까. 하지만 <은어낚시통신>이 윤대녕의 출세작이란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 책이 윤대녕을 정의하는 가장 적합한 키워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려나…….

<은어낚시통신>에 나오는 남자들은 모두 무언가를 갈망한다. 관념적으로든 현실세계에서든 그들은 무언가를 쫓고 있고, 그런 모습을 작가는 무기력한 듯 하면서도 우수에 찬 모습으로 그려낸다. 책의 말미에서 남진우는 이것을 '존재의 시원(본질)으로의 회귀'라고 해설을 하는데, 그런 남자들이 회귀를 통해 미완에서 완성을 추구하는 반면 여자들은 원래 있었던 것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모두 어딘가 불안정하다. '결락缺落'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그녀들은 무언가를 상실한 모습이다.그러나 그녀들의 회귀는 갈망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모습은 늘 조금 쓸쓸하다.

 <은어낚시통신>의 맨 앞 세 단편은  그 배치가 참 절묘하다. '은어'를 거쳐 '…미아리통신'을 지나 '은어낚시통신'으로 이어지는 이 세 단편들은 각각 독립성을 지닌 단편들이지만 동시에 연작의 느낌도 준다. 더불어 책의 분위기를 결정짓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심지어 인물들의 특징도 유달리 비슷해서 다른 단편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친밀함마저 느껴진다. 이 세 단편을 거치면서 <은어낚시통신>이란 단편집에 조금 익숙해지고 나면 '불귀'를 지나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가 나오는데, 아마 책 내의 단편들 중에 가장 직관적 이해가 빠르고 이야기적 재미가 있지 않나 싶다. 마치 전래동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오컬트적인 분위기도 풍기면서 신비감을 돋운다. 여기서도 잠시 하루키 같은 어떤 느낌을 받았는데 하루키가 원숭이를 소재로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신비하게 엮었다면 윤대녕은 말을 통해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 '국화 옆에서''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은 구성적으로 '불귀'와 닮아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찾아 직접적으로 행동한다는 부분이 그렇고 그 여행길에 동행이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결국은 목표물이 아니라 동행과의 대화와 접촉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 잃는다는 게 가장 큰 공통점이 아닐까 한다. '카메라 옵스큐라'에서는 '은어낚시통신'의 청미와 비슷한 여인이 나오지만 청미가 '나'라는 인물의 회귀를 직접적으로 이끌면서 돕고 있는 반면, '카메라 옵스큐라'의 진이는 '나'를 흔들어놓음으로써 회귀를 돕는다.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은 앞선 '카메라 옵스큐라'와 함께 -비록 순간적이긴 하지만- 가장 짜증났던 단편이 아닐까 싶은데, 평범한 대사를 통해 보이는 남자의 비겁함이나 본능적인 이기심, 여자의 패배의식이 -앞선 작품들에 비해- 두드러져 그리 기분좋지는 않았다. 특히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의 서상수 캐릭터는 언뜻 이해가 가면서도 '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야!'라고 느끼게 만든다. 좀 더 솔직히 말할까? 피임관련 대사가 최악이었다.-_- 젠장. 그저 인물을 설명하는 부분적 장치려니 하고 넘어가긴 하지만 완전 씁쓸하다. 그 뒤에 남기수 캐릭터가 자조적인 어투로 어느 정도 커버해주긴 하지만,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눈과 화살'은  음, 일단 재밌다. 어느날 실종되어버린 한 남자와 그를 찾으려는 또 다른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표면적인 내용이다. 신축 백화점 옥상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경비원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와 더불어 약간의 추리기법이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실종이 아니라 어쩌면 가출일지 모르는 그 남자에게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처음 윤대녕을 만났던 때로부터 약 10년 만에 이 책을 읽느 느낌이라면 단연코 '세월의 흐름'일 것이다. 단순히 그때보다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은어낚시통신>에는 밀레니엄 시대에는 나오지 않을 90년대만의 어떤 느낌이 있다. 그것은 80년대의 척박함에서는 벗어나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자유롭지도 않은 어떤 과도기적 혼란함이다. 시대가 엿보이는 묘사에서부터 존재를 고민하는 인물들,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순간순간 과장되게 멋부리는 문장까지 어느모로 보나 <은어낚시통신>은 그런 시대적 특성(혼란함) 속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의 시원'을 좇아 거슬러올라가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슬러 올라간 그 끝에는 말끔히 정리해 줄 답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혹자는 윤대녕을 두고 '90년대에 최적화된 작가'라며 그래서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힘을 못 쓰는 거라고 하지만, 글쎄…… 아직은 알 수 없지 않을까. 20세기를 아우른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 그도 지금 정체상태일지도 모르지. 적어도 그의 소설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처럼 독자에게 회귀본능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나는 안다. 90년대에 비해 작품활동이 다소 저조하지만 곧 활어처럼 힘차게 물위를 튀어오를지 모를 일이다.

<은어낚시통신>을 읽으면서 -자칫 잘못 들면 손목 꺾이는- 한+국어대사전을 옆에 두고 봤다. 모든 낯설게하기 기법이 그렇겠지만 윤대녕은 아는 단어도 생경하게 만드는 문장을 구사한다. 대체 '사무치는 얼굴'이 어떤 얼굴이란 말인가. '사무치다'의 느낌을 알고 '얼굴'의 의미를 알지만 무엇이 사무치는지는 생략한 채 그저 '사무치는 얼굴'이라고 툭 던져놓으니 그게 어떤 얼굴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흐릿한 이미지만 떠올랐다 사라질 뿐. 문학이 아니면 쓰이지 않을 단어와 문장들도 그런 생경함에 단연 한몫했다. 아무튼 난 조금이라도 낯설다 싶은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찾으며 천천히 (때로는 조그맣게 소리내어) 책을 읽었다. 300페이지 조금 넘는 책을 무려 5시간이나 넘게 걸려 읽은 것만 봐도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천천히 공들이며 읽었는지 알 수 있다. 고등학교 때 고전이나 신소설을 읽을 때 빼고는 이렇게 책을 읽기는 실로 오랜만이다. 윤대녕의 묘사방식은 구체적 사물을 열거하면서 오히려 낯설게 하기도 한다. '…미아리통신'이나 '국화 옆에서'를 보면 내가 아는(가봤던) 동네의 건물, 풍경등이 주욱 열거되는데, 분명 언젠가 한번쯤 지나다녔음에도 마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수록된 첫 단편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을 읽으면서도 그랬는데, 어쩌면 작가들은 그런 능력을 타고난 건가? 아니면 글묘사란 태생적으로 그림묘사와 다른 묘한 낯설음을 주는 걸까?

젊은 날 윤대녕의 책이 어려웠던 이유는 그의 책이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설은 알고보면 격정적이지만 표면적으로 아주 고요하다. 격정에 다다를 때까지 그 인내를 유지하기란 그 시절의 나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뭐가 됐든 이제 한동안은 <은어낚시통신>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또 언제 회귀하듯 떠오를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내려놓고 싶다.



덧,
1. 기억에 '문학의 이해' 교수님(강사인지도 모른다)은 이론 수업 빼고, 몇 가지 단편을 선정해  2주씩 나눠 수업을 하셨었다. 그때 교본이 되었던 작품 중에 <무진기행>도 기억에 남는데, 그러고보면 그 수업이 은근히 나한테 영향을 많이 줬던 것 같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도 그 수업 때문에 보고 싶어졌으니까.

2. 이 책 구하면서 프리미엄을 왕창 붙인 중고책들을 몇번 봤는데, 아- 그런 책들 보면 기분이 참 그렇다. 난 아무리 레어본이라도 몇십 년된 고서가 아닌 바에야 그런 식으로 웃돈 얹어서 파는 게 영 마뜩찮다. 원가의 15%이상 프리미엄 붙으면 안 팔고 안 산다는 주의라 그런가. 지나치게 프리미엄 붙은 책들 보면 가치가 우러러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책에 대한 단념이 빨라진다. (일례로 고려원 판 영웅문이 그랬다.-_- 대여점을 돌고 돌아 변색은 물론이요 낡아서 곧 수명이 다 할 것 같은데도 워낙 지난 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라 수요가 많다보니 원가의 2~3배는 기본이니 이거 원. 그냥 안 사고 만다.) 물론 이 원칙을 깨본적이 있긴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였는데, 대여점용으로 돌던 책을 무려 두 배의 가격에다 배송료까지 물면서 샀는데 사고나서 얼마 안 되어 개정판 나오는 바람에 피토할 뻔 했다.-_-; 다행히 개정판을 증정 받아서 그걸로 위로했지만; 그 이후로 프리미엄 붙은 책은 아무리 읽고 싶어도 열번 심사숙고한다.

아  그러고보니 얼마전에 절판된 만화 <좌부녀>를 구했는데, A중고샵에서 정가 3800원인 이 만화책을 희귀본이라면서 14000원(상태 - 중)에 파는 걸 봤다. 기절할 뻔 했다. -_-;;;; 허헐. 1700원(상태 - 최상) 주고 산 나는 거저 먹은거구나.-ㅁ-;

3. 이런 기사를 봤다.

http://economy.hankooki.com/lpage/entv/ ··· 4220.htm

문학동네는 (…중략) 또 1994년 나온 윤대녕 씨의 소설 '은어낚시 통신'의 내용을 대폭 수정해 3월에 개정판을 낸다.


-_- 항상 이런 식이야. 우어어어.
하지만 5월인데도 아직 안 나온 걸 보면 작업이 좀 늦어지는 듯.
그나저나 내용을 대폭 수정한다니?????
그럼 그건 이미 '은어낚시통신'이 아니지!!!!!
차라리 속편을 쓰시라구요. ㅠ

신필이라는 김용 선생도 그렇고, 아니 왜 이미 세상 나온지 몇십 년 된 작품에 자꾸 손을 대시지?
의천도룡기 결말 수정된 거 보고 식겁한 뒤로 난 작가분들이 기존 작품에 손대는 게 무섭다.
그래서 난 이 작업 반댈세.

  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우리 문단에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져줬던 문제작. 뛰어난 도시적 감수성과 신선한 문체로 독자와 평단의 주목을 동시에 받으며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의 이미지에서 진정한 삶을 향한 '거슬러 올라가기'의 모습을 찾는다.
2009/05/27 12:40 2009/05/27 12:40
며칠 째 계속 새벽 4시가 좀 넘으면 잠이 깬다. 역시 깨자마자 하는 일은 관련 뉴스를 보는 것이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만 책 정도나 읽을 뿐인데, 그것마저도 죄스러우니 이걸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검찰, 언론, 정부에 따지기 전에 나부터가 그분의 죽음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다. 치열하게 살다 간 그 앞에서 부끄럽고, 비겁하게 살고있는 현재의 내가 초라하다. 원죄처럼 앞으로도 두고두고 이럴까봐 나는 무섭다. 그리고 다시 그 비겁함에 몸서리쳐진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 이 번뇌는 계속되겠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제 영웅이 될 거라는 세간의 말에 동의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을 맞고 죽은 후 사람들의 뇌리에 "그래도 우리나라 살린 분이다!'라는 인식을(어떤 이들에게는 그것만) 뚜렷하게 남긴 것처럼. 하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독재도 하지 않았고, 가장 탈권위적이었으며, 심지어 서민과 가장 가까운 대통령이었으니 영웅 아니라 신이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신격화는 경계해야하고 재임 시절의 과오 역시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나는 그런 것에 앞서 그저 그렇게 쓸쓸히 돌아가신 그분을 보듬어드리고 싶다. 그러고싶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터져나오는 사건정황에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다. 음모론이 흘러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 애초에 추락한 사람을 업고 뛰었다는 경호원의 말이 도무지 신뢰가 안 갔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해선 안 되는 걸 교육도 받은 경호원이 그랬다고 하니까 신뢰가 안 갈 수 밖에. 당황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뭉뚱그려진 그런 사소한 증언이 사람들 사이에 불신을 낳았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음모론을 확대 재생산해서도 안 되겠지만,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 검·경찰이 곱게 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다. 초동수사 허술하게 끝내고 이제 와서 당황한 기색 보이면 지켜보는 사람이 어떤 마음일 것 같나. 그렇기 때문에 분단위로 사건을 재구성해 관련기사 뱉어내는 언론을 마냥 '소설 쓴다'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은 또 조/선/일/보 로고 파일명에 대한 음모론도 인기검색어로 떠올랐던데, 실수겠지만(그렇게 믿고 싶다) 자꾸만 소름이 돋는다. 이러지말자. 응?

다 허망하다. 감정과잉이어도 좋다. 지금으로선 그저 그분이 보고 싶을 뿐이다. 목소리 생생히 울리는 돌발영상 보면서 오늘도 눈물 뚝뚝이다. 보고 싶어요. 보고싶습니다. 2009/05/27



헐, 한나절 뉴스기사며 게시판 안 봤더니, 지금 들어와보니 난리네. 사람들이 음모론(정확히는 타살)에 대해 너무 확신하고 있어서 당황스럽다. 의심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온갖 설들을 퍼다나르면서 그쪽으로 굳히고 있다니...(개중에는 제법 진지하게 의혹을 제기하는 글도 있긴 하더라. 그런 글은 말그대로 의혹 제기지 무작정 우기는 게 아니라 흥미롭긴 했다. 일정 부분 의심스러운 것이기도 하고.) 아마 경호원이  증언을 번복함으로써 상황이 더 그렇게 꼬인 거 같긴 한데, 이런 식이면 실체는 남지 않고 설들만 남아 결국 진실이 가려질 뿐이다. 정조 독살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것 같다던 이글루스 글에 대공감!!! -_-; 계속 인터넷 붙잡고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의혹 불리지 말고 차라리 좀 멀찍이 떨어져 보는 게 어떨까 싶다. 2009/05/28
2009/05/27 06:56 2009/05/27 06:56
우르르 쏟아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명하게 귀를 뚫고 들어오는 한 마디.

"...자살했대!"

만성이 되어가는 건지, 예전처럼 놀랍지 않은 저 단어를 듣고 '또, 누가 자살한거야? 아니 왜 이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 하고 혼자 삐죽거렸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또야?'하는 불경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에 흠칫 놀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또 다시 귀에 들어오는 한 마디는 빠른 걸음으로 인파를 헤치며 나오던 나를 그 자리에 우뚝 서게 만들었다.

"노무현 말이야!!"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이게 무슨 말이지. 누가 죽었다는 거야? 누가 자살했다고? 정신없이 그 말을 내뱉은 사람을 찾았다. 전화기를 귀에 댄 어떤 남자였다.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그 남자는 전화 속 인물에게 하는 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모를 표정으로 다시 한번 또렷하게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 자살했다고!"


멍했다. 발걸음은 기계적이고, 눈에는 촛점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했다. 사실인지 물어봐야겠어. 하지만 동생의 전화 받는 목소리에서 이미 알았다. 정말이구나.

어쩜 이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작년에 최진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만큼 아니 그것보다 충격적이다. 최진실은...... 그래, 최진실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 한명이었고, 워낙 흉흉한 소문에 시달렸던 고인인지라 나까지 말 보태기 싫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도 안 하고 넘어갔다. 적어도 글로는.

그런데 이건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어쩜 이럴 수가 있냐고 아무나 붙잡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속보에 무릎이 휘청거렸다. 내리자마자 집으로 뛰어가서 뉴스를 틀었다. 마침 인간 노무현의 삶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 이 영상...... 대통령 당선 때 봤던 건데...... 그땐 참 가슴 뭉클했었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의미로 또 다시 눈물 흘리게 만드는구나.

욕지기가 튀어나온다. 결국 사람 하나 죽이는구나, 그런 생각 밖에 안 든다. 겨우 TV에서나 얼굴 보던 일반 시민인 나조차도 이런데, 혼자 남은 권양숙 여사는 어떡하나 싶다. 실신? 수십번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테지. 너무 꼿꼿하면 부러지는 법이라고 했던가. 어떤 것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 자신을 포기한다. 급격히 무너져 그는 결국 부러져버렸다. 그리고 떨어졌다. 낙화처럼 바위에서 훨훨.

대통령이 아닌 자연인 노무현을 좋아했다. 인간적으로 좋은, 본 받고 싶은 면이 있는 그런 어른이었다. 그래서 퇴임 연설에서 "기분 좋다~"하고 후련하다는 듯 내뱉은 그의 말을 들으며 이젠 좀 편안해지셨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 그랬는데 결과는 이렇게 되었다. 쓸쓸하고 허망하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쩜 이렇게 파란만장한지 모르겠다. 그냥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이었다면 올라갔다 내려갔다 즐기기나 하지, 이건 자이로드롭잖아. 강렬하지만 허무하다고. 마치 역사서에 나오는 비운의 인물 같아. 하긴 이젠 정말 역사가 되어버렸네. 그 역사를 두려워 할 줄 아는 유일한 대통령이었는데, 이렇게 생애를 마감해서 유감이다. 실망도 많이 했고, 배신감도 적잖게 들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연민이 느껴져 쉬이 욕할 수 없던 그분,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기를 빈다. 그리고 참 많이 그리울 것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의 빕니다.




덧,
어떤 식으로든 정국에 불어닥칠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분의 죽음이 자살이든 아니든 결국은 모두가 일조를 한 셈이니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선례를 만들어버린 현 정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똑똑히 두고 볼 것이다. 2009/05/23



새벽에 잠이 깨서 또 그분과 관련된 글들과 사진들 보며 훌쩍훌쩍 울다보니 아침이 되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누군가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저 자꾸만 미안하고, 슬프고, 그런데 그걸 풀 수 있는 방법이 뭔지를 모르겠어서 가슴이 답답했다. 시골에서 그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면서 그렇게 소일하는 걸 원하셨는데, 그것조차 못해 고통스러웠다는 마지막 말씀이 자꾸 밟혀서 속이 상한다. 2009/05/24



나에게 이렇게 영향을 많이 끼치는 분인 줄 몰랐다. 식욕도 없고 몸까지 안 좋아져서 어젠 약속도 취소하고 잠만 잤다. 새벽에 눈을 떴는데, 처음 드는 생각이 그분 생각이었다. 어제 오늘 책을 두 권이나 읽었는데, 푹 빠져서 읽으면서도 순간순간 눈물이 차 올랐다. 백성이 무엇이고, 다스림이 무엇인지 얘기하는 책이라서 더 그랬을까. 울컥하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나올라치면 그걸 핑계로 엉엉 울면서 책을 읽었다. 어쩌지? 이 상실감을 어쩌지? 사람들이 담배 피고 싶어하는 기분을 알 것 같다. 나도 피고 싶어. 문득 푸른새벽의 노래가 미치도록 듣고 싶어 재생시켰는데, 랜덤으로 돌아가는 첫 번째 곡이 푸른자살이다. 심장을 찌른다. 2009/05/25
2009/05/23 14:11 2009/05/23 14:11
너무 오래된 친구

이승희, 너무 오래된 친구


내 소중한 분철 만화 중에 하나다. 이승희는 크게 히트한 작품이 없어서 아는 사람이 많이 없지만, 혹시라도 "나 이 만화가 알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왠지 기쁘게 화제로 삼을 수 있는 만화가 중 한 분이기도 하다. 이 만화를 도대체 어디서 뜯어내서 보관하고 있는지는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한 기억과 종이질로 봐서 댕기나 윙크 중에 하나일 텐데... 검색해봐도 안 나오고... 하여간 뭐가 급했는지 들쑥날쑥한 모양새로 북 뜯어낸 자국이 영 마음에 안 들지만,  이승희의 말장난이나 개그감각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안 버리고 건져낸 것만도 다행이다 싶은 만화다.

사실 이승희의 작품 중에 제일 기억나는(혹은 좋아하는) 건 "그린벨트 속의 빨간 여우"라고, 그 옛날 최초로 20대 여성을 타겟으로 한 순정만화잡지 <투유>에 연재된 작품이다. (여기서 잠깐 딴 얘기!) 아무리 생각해도 '빨간 여우'만 생각나고 완전한 제목이 생각이 안 나서 미친듯이 구글을 쥐어짜서 제목을 알아냈는데, 그 제목 언급하신 분이 "그린벨트 속의 빨간여우"가 <칼라> 연재작이라고 하셔서 순간 당황했다. 나도 <칼라>를 사긴 했었지만, <칼라>가 지금 생각해도 파격적인 주간잡지(무려 한달에 4번 발행)인 탓에 댕기, 윙크, 투유 세가지 잡지 사는 것만도 벅찬 나는 <칼라>는 초반에 좀 사다가 말았었다. 그런데 거기서 연재되었다고 하니, 도무지 납득이 안 갈 수 밖에. 왜냐하면 난 "그린벨트 속의 빨간여우"를 엄청 반복해서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만화가 <칼라> 연재작이라면 난 <칼라>를 대부분 친구한테 빌려 읽었기 때문에 보고 또 볼 여유 같은 게 없었을 텐데……. 그분 기억이 잘못된 건지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투유>와 <칼라>의 발행시기가 겹칠 때 세상에 나온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93년 말에서 94년 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린벨트 속의 빨간 여우"는 어느 괄괄한 여자 주인공이 한 남자와 만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나름 냉철한 그 남자는 여자 주인공만 얽히면 평정심을 잃고 우르릉쾅쾅, 말다툼을 벌이는 이야기가 전반부를 이룬다. 그러다 서로를 좀 더 알게 되고 언제부턴가 사랑의 감정이 샘솟기 시작할 무렵, 여자에게는 의심스러운 분위기를 잔뜩 풍기는 남자가 자꾸 찾아온다. 여자는 그 남자를 피하려 하지만, 의심스러운 그 남자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사소한 싸움판에 여자가 얽히게 되고, 그 와중에 여자가 전직 여깡패였다는 게 밝혀진다.(아, 단어선택이 뭔가 웃겨;;;;) 그저 그런 날라리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큰 조직을 이끌던 여두목쯤 되는데, 그 의심스러운 남자는 그 여자를 좋아하는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 내 기억에 여자가 그쪽 세계에서는 거의 전설의 인물이라는 설정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빨간 여우'는 그 세계에서 쓰이는 여자의 별명이었지 아마. (빨간 여우 목도리라도 하고 다녔던건가... -_-;) 아무튼 마지막에는 대대적인 결전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누가 죽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히 안나는군. 나중에 단행본으로 나온 거 없나 해서 찾아본 적도 있는데, 워낙 반짝 신인으로 떴다 사라져서, 단행본은 커녕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아쉬울 따름.

사실 지금 생각하면 내용은 약간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데(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희는 유쾌한 만화를 많이 선보여서 나는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다. 특히 빵빵 터지는 말장난과 핑퐁 같은 대사들에 깔깔거리다보면 기분 전환이 절로 되었다. 그 중에 이름개그도 퍽 기억에 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유부남'. 크하하. 남자 이름이 '유부남'인데, 그걸 모르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가 "유부남입니다!"하자, 상심해가지고 '꼭 유부남인 걸 저렇게 밝힐 필요가 있나?' 하면서 오해하는 설정에 배꼽빠지게 웃었던 기억도 있다.

이제 본 이야기로 돌아와서, "너무 오래된 친구"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어릴 때부터 친구로 자라온 남녀가 서로에 대한 본심을 깨닫기까지의 과정이 코믹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한마디로 친구가 연인이 된다는 흔해빠진 설정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꽤 잘 먹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남자 주인공인 찬희는 혜지와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인데, 어느날 혜지네 반에 새로 전학 온 민선이란 여학생에게 반한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혜지는 찬희가 연애상담을 해오자 싱숭생숭해지고, 급기야 찬희가 자신을 빼놓고 민선이와  먼저 집에 가버리자 혜지는 뭔가를 뺏긴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혼란해 한다. 그런 혜지에게 찬희는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을 속일거냐?"는 뜻모를 말을 하고, 혜지는 점점 고민의 늪으로!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모든 게 찬희의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나름 가슴 두근거리는 장면도 있는데, 혜지가 배구 연습을 하는 중에 찬희와 민선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배구 공에 맞아서 기절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순간, 깜짝 놀라서 민선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혜지에게 뛰어가는 찬희 모습! (우왕~) 뭔가 학창시절 여학생이라면 한번쯤 꿈꾸어봤을 상황이지 않나. (아..아닌가? 나만 그래?;;;;;) 하여간 그 사건으로 찬희가 꾸민 계략(...)의 전말이 밝혀지고 그 과정에서 찬희를 돕다가 적발된 찬희 친구 하나는 혜지에게 주먹으로 응징을. (캬캬캬) 극에 크게 영향을 주지않는 약간의 반전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다. 결과야 뭐 다들 다들 예상하시는 대로. 결국 만화 맨 앞장에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있나요?"에 대한 답은 3번, 출제자 맘에 달린 거였다.


남녀 사이에 친구관계, 나아가서 우정이란 게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생각보다 뚜렷한 해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술자리에서도 이에 관한 얘기를 꺼내다보면 각양각색의 의견과 자기 경험들이 튀어나오곤 하는데, 듣다보면 참 재밌는 게, 여자일수록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반면, 남자일수록 '말도 안 된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 그리고 어릴 수록 남녀 사이의 친구 관계를 믿는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건 남자의 대부분은 '남녀사이의 친구관계'를 성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여자는 감성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뭔가 이 하나만으로도 가깝고도 먼 남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해야하나. 그리고 여자는 희망의 측면을 이야기하고, 남자는 현실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는 느낌도 받았다. 나는 옛날엔 이성도 동성 못지 않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나이가 들 수록 그건 상당히 힘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이성간의 우정이란 동성끼리의 그것과는 그 성질이 다르지 않을까. 누구말마따나 어느 쪽이든 한쪽에만 애인이 생겨도 멀어지는 게 다반사니까. 애인 있는데 이성친구를 1:1로 만나기란 주위 반응과 시선이 좀 부담스럽지. 아니면 이 만화처럼 변질(?)될 가능성도 있다. 친구가 아닌 연인사이로의 발전. 축복해 줄 순 있지만 이건 순수한 우정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어느 노래가사처럼 '헤어지면 가까스로 친구사이'가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결국 남녀 사이란 친구라는 '무형의 관계'는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정'이라는 '무형의 감정'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것이 아닐까. 물론 간혹 그 반대이거나 두가지 다 잡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남녀 사이의 찐한 우정 같은 것에는 이제 좀 회의적이다. 내 경험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과연?)




뭐가 됐든...


2009/05/18 21:23 2009/05/18 21:23
경관의 피


[경관의 피]라는 제목을 보고 '경관이 흘린 피'라고 해석하고는 이 책이 경관 살해 사건에 관한 추리 소설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될 수 밖에 없는 게, 미스터리 하면 내용상 으레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과정을 추리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나. 그러니 피라는 낱말은 당연히 살인으로 직결되고 앞에 경관이라고 씌어져 있으니 그 피는 당연히 경관이 흘린 피라고 생각할 수 밖에. 직관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피는 그 피가 아니라네? 여기서 말하는 피는 핏줄, 즉 혈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피였다. 무려 삼대에 걸쳐 경찰관의 길을 걷는 어느 일가에 대한 이야기다. 보통 아버지-아들 이대가 같은 직업을 갖는 것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장인들처럼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삼대에 걸쳐 같은 길을 걷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그 긴 기간에 걸쳐 의혹의 살인 사건을 수사한다는 설정이니 호기심이 생길 수 밖에. 궁금하면 읽어야지 별 수 있나.

늘 '할아버지의 이름을 거는' 김전일처럼 자신의 윗세대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인물이 나와서 사건을 수사하는 내용일 줄 알았다. 그러니까 메인은 손자,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는 회상이나 상상속에서 등장하며, 손자가 윗세대들의 사건을 역추적해서 결국 해결하는 구조일 거라고 멋대로 상상했다. 그리고 에필로그로 상황 정리해주고. 영화도 그런 거 있지 않나. 본편 다음에 프리퀄, 그 다음에 씨퀄. (아마 <무간도>가 그랬었지?) 하지만 내 상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 소설은 강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아니라 중력에 의해 떨어진 사과처럼 아래로 흐르는 포멀한 타입이었다. 아, 하나 맞은 거 있네. 에필로그는 있더라.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고, 1부는 일대 경찰관 안조 세이지, 2부는 그의 아들 안조 다미오, 3부는 손자인 안조 가즈야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제법 두툼한 두 권의 책은 보기도 전에 질리기 딱 좋아보이지만, 다행히 군더더기 없는 문장 덕분에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200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미스터리에 방점을 찍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저 인기순위에서 1위했구나, 어느 정도 검증은 되었구나 정도만 알면 되지 않을까. 사실 [경관의 피]는 미스터리에 있어서는 그리 내세울 입장이 못 된다. 서술은 사건을 죽 나열할 뿐이고, 몇 건의 살인 사건에 대한 문투는 긴박감보다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할 뿐이어서 어떤 면에서는 단조롭다. 간간히 호기심을 유발하며 문장을 끝맺지만 그게 끝이다. 심지어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읽으면서 복선이 너무 티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오히려 거꾸로 의심했다.이런 식으로 쉽게 걸려들도록 만든 뒤 반전을 노리는 건가 하고.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반전은 반전인데 내가 생각했던 그런 유의 반전이 아니라, 뭐랄까 좀 더 근본적인 어떤 것에 대한 반전이다. 결국은 난 또 한번 '미스터리'에 당한 거다. [경관의 피]는 삼대에 걸친 미스터리가 아니라 삼대에 걸친 서사이고, 역사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철학적인 문제까지 던져주며 날 고민에 빠져들게 했다. 상대적 궤변과 절대적 진실 사이에서 방황하느라 침대에서 머리 쥐어 뜯었다면 난 이 책에 너무 심취한 걸까. 에필로그는 감동이 아니라 아릿했다. 그 아릿함을 감동으로 받아들이기엔 그간의 서사가 너무나 묵직했다.

어쩌면 작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라고 쓴 책 같았다. 안조가(家)의 일대기를 통해 전후 일본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조직에 속한 인간의 고뇌를 보여주며 한 집안을 책임지는 남자에 대한 연민을 독자에게도 전달하는 것. 이것이 작가가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슴 한켠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어느 순간 마음이 굉장히 불편해지곤 하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1부를 구성하는 세이지의 이야기에는 전후 일본 상황이 건조하지만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폐허 속의 궁핍한 삶들은 거짓이 아닐 테지. 하지만 그 모습에서 난 자꾸만 일제강점기를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자신들도 결국 전쟁의 희생양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네들의 나라에 의해 반세기가 넘도록 고통받았고, 그 흔적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 아픔을 선뜻 공유하기가 힘들었다. 하물며 그런 피폐한 자신들을 일으켜 세운 부흥의 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이라면, 분통까지는 아니라도 감정이 미묘해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아마 이런 이유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한국에서 출간되는 걸 반기면서도 그 첫 작품이 [경관의 피]라는 게 마냥 기쁠 수 만은 없었으리라. 드물게 한국어판 서문까지 붙인 것을 보면 여간 조심스러웠던 게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출판사에서 먼저 권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이대, 안조 다미오의 생애였다. 아버지의 모습을 쫓아 경찰관이 되었지만 격렬한 시대의 흐름에 이리저리 휘말리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서도 안타까운 삶이었다. 더욱이 그로 인한 후유증이 내가 끔찍하게 혐오하는 형태로 나타나버려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나마 가즈야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된 것까지는 보여주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가부장적 가치관 아래 가장의 입장을 중점적으로 대변한 나머지 여성은 저만치 들러리가 되거나 가엾은 피해자 정도로 인식되어버리는 게 못내 안타까웠다. 남편이 때려도 말 한마디 못하고 그것도 남편이라고 감싸안아주는 모습이나 부부 간의 문제는 함부로 관여할 수 없다는 지극히 동양적인 마인드는 아무리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런 시대였다고 에둘러 변명하기엔 아픔이 너무 깊다. 쓸쓸함 속에 그나마 통쾌했던 건 마지막 가즈야의 뻔뻔함을 가장한 협상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 전에 범인이 내뱉는 궤변인지 현실적 통찰일지 모를 그 말들은 아직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다. 가즈야 역시 그럴 테고. 물론 그는 어느 정도 결론을 낸 것 같지만. 내용 전체를 아울러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모두가 시대의 슬픔이고 조직 속 인간의 아픔으로 휘발되어 버린다. 삼대를 이어 경찰관이 된 그들의 삶은 내막 모르는 타인의 평가처럼 가문의 영광이었을까, 아니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을까. 판단은 역시 개인의 몫이겠지.

전체적으로  깊고 긴 이야기다. 던져놓은 과제도 가벼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문장들과 삼대를 거쳐 그물처럼 얽히는 사건 및 인물들로 인해 나름대로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지나온 역사와 지금의 현실을 외면하지만 않는다면(제대로 인식하고만 있다면) 그리 읽기 어려운 소설은 아닐 것이다. 알고보니 올 2월에 아사히TV에서 50주년 개국 기념 특집극으로 방영되기도 했단다. 에구치 요스케와 시이나 킷페이, 이토 히데아키 등 연기파 탑배우들이 대거 출연을 했다니 50주년이라고 공을 제법 들인 모양이다.기회가 된다면 한번 보고 싶긴 한데...... 영상화된 걸 보는 건 솔직히 자신없다. (그나저나 에구치 요스케... 아사히 50주년 기념 드라마를 2개나 찍었네?; 방송국 VIP인가요? 호호.)




덧,
총 900페이지 가까이 되는 가볍지 않은 분량임에도 막힘없이 끝까지 한방에 완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작가 자신의 문장구사력도 있겠지만, 번역가의 능력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번역이 마음에 들어 번역가의 이름과 이력까지 기억해두기로 했다. 얼마전에 모 번역가가 번역한 소설 읽다가 그 미칠 것 같은 번역투와 희한한 문장 구사에 버럭 짜증이 나서 책 집어던진 적이 있는 나로서는,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달까. 이 책을 그 번역가가 번역했다면 난 애저녁에 포기했을 거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번역서를 읽는데 내용이 아니라 원문이 뭔지가 먼저 떠오른다면 그건 실패한 번역이 아닐까. 그건 해석이지 번역이 아니잖아. 하물며 한국말로도 어색하다면. 어우, 사양한다. 어쨌거나 이 책은 그런 짜증 없어서 아주 만족. 다른 번역서들도 읽어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괜찮은 번역가 한 명 알게 되어 기쁘다.




  경관의 피 -상 - 블랙 앤 화이트 0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200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를 차지한 사사키 조의 장편소설. 두 건의 살인과 한 건의 의문사를 추적하는 정통 미스터리의 틀 위에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기의 격변하는 시대상과 가족상, 60여 년에 이르는 세월의 흐름과 경찰 조직 안팎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인과관계까지 농밀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2009/05/18 21:20 2009/05/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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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그의 소설만 대략 스무 작품 가까이 되는데, 아직도 찾아보면 안 읽은 게 더 많다는 사실에 뜨악한 기분이 된다. 데뷔가 85년이니 20년이 넘긴 했지만 솔직히 이만큼 다작하는 소설가 별로 보지 못했다.(아, 요즘 온다 리쿠가 맹추격하고 있지;) 90년대에는 '이건 뭐 공장에서 찍어내나' 싶은 정도로 줄줄이 비엔나처럼 작품을 내주시는데, 위키 들어가서 작품 목록 보다보면 감탄이 나올 정도. 보통 전성기가 있고 나면 시들기 마련인데, 이 분은 시들만 하면 뻥 터뜨려서 입지를 공고히 해주시니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기까지. 수작과 평작이 교차하는 그의 작품세계. 딱히 졸작은 없으나 대작 수준의 작품 역시 마땅히 없는 것이 한계라면 한계랄까. 한 때는 [백야행]이, 현재는 [용의자 X의 헌신]이 그를 대표하고 있지만 늘 2% 부족한 어떤 것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 히가시노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빠른 스피드와 그때까지 접해보지 못한 맛깔스러운 이야기들에 폭 빠져서 '아, 재밌다' 하고 좋아했지만, 이후 진정된 상태에서 하나씩 따지고 보면 어쩐지 아쉬워지고 마니, 영 기분이 그렇다. 어쩌면 내가 읽은 작품이 점점 많아지게 되면서 작가에 대한 욕심이나 바람 같은 게 생겨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위에서 이런 평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걸로 보아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어쨌든 그의 그 2%를 뛰어넘는 작품이 나온다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추리 소설사에 한 줄기를 담당하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의 이름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긴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그저 지금은 그 기반을 착실하게 다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겠다.아직 나이도 젊잖아.(아, 이제 젊은 편은 아닌가;)

사설이 길었다. 겨울에 [유성의 인연]을 읽은 후 히가시노 소설은 오랜만인데, 뭐 늘 그렇듯 일정 수준의 재미와 퀄리티를 보장한다. 하지만 이제 그의 소설 패턴에 익숙해진 탓일까. 예전이라면 흥미진진했을 사건들이 이제는 좀 시들하고, 은근히 진행 방향이 눈에 보여 약간 김빠진 것도 사실이다. 초창기 소설이라 더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리고 읽으면서 문득 기시감 같은 걸 느꼈는데, 어째 인물의 특징이나 인물을 둘러싼 환경 같은 게 낯설지 않은 거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다가 역자 후기 보고 깨달았다. 내가 읽은 그의 여러 소설들과 이 소설은 공통점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같은 작가의 작품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이후 소설들의 모태랄까 원형적인 모습을 아주 많이 보여준다. 그래서 이야기 전체가 빠르게 인식되지만, 긴장감이나 의외성이 덜 느껴져서 예전처럼 재미를 못 느꼈는지도.

언젠가 히가시노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여성이란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는데(어디 끄적여 둔 것도 있을 텐데;), 가만 보면 그의 소설에서 여성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건 전개의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니면 사건의 직접적인 이유가 되거나. [브루투스의 심장]에는 야스코라는 여자가 나오는데, 이 여자는 도도하고 수완이 좋으며 매력적이다. 하지만 결국엔 남자를 파멸로 몰고 가는 팜므 파탈 캐릭터. 이는 [백야행]에서 그 속성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는데, 행동의 당위성이나 캐릭터 고유의 매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만 어쩐지 유키호를 생각나게 만드는 인물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에 대한 문제까지도.(물론 야스코는 팜므 파탈이라기엔 그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또 마력(매력이 아님;)이라는 게 부족해서 그저 꽃뱀(...) 수준에 머물러 있기는 하다. 한마디로 유키호 승! 마성의 유키호)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소설 중에 이른바 '백야행 2'로 불리우는 [환야]도 약간 그런 느낌이라는데, 예시 뽑아서 리스트 만들어보면 재밌을 것 같은 생각까지 든다. 물론 히가시노 소설에서 모든 여성이 다 그렇게 팜므 파탈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자로 인해 사건이 시작되는 경우가 꽤 많아서, 게다가 대사 중에 '여자란 무서워'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인식이 많아서 '한번은 살짝 짜증이 난 적도. 그런 경향은 그의 소설가 재직 기간(응?)을 초,중,후기로 나눴을 때 초기나 중기 소설일 수록 강하고, 최근작일 수록 덜하지만 어쨌든 무시할 수는 없다. 반대로 그의 소설에서 남자는 대체로 나쁜 놈이거나 불쌍한 스타일. 사건 바깥에서 추리하는 인물이 아니라면 대부분 저런 패턴이다. 물론 나쁜 놈이면서 사건을 추리하거나, 불쌍하면서 나쁜 놈인 교집합도 가능하다.

[브루투스의 심장]은 로봇이 소재로 사용되는 만큼 이공계 출신인 저자 자신의 경험이 다수 작용했다는 점에서 [레몬 Lemon]이라든지 [변신], [탐정 갈릴레오]나 [예지몽]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소재들이 인간의 탐욕과 결합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철학적인 물음도 던진다. 또 강도가 약하긴 하지만 사람들의 선입견을 이용하는 범행 구성으로, 허를 찌르는 (줄거리를 모르고 본다면 더욱 신선할) 재미를 선사하니, 사실 초반부터 범행 방법을 알려주고 그것을 추리해가는 방식이 아니었다면 나 같은 범인(凡人)은 깜빡 속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의][용의자 X의 헌신]처럼.

제목도 참 절묘한 게, 정작 로봇 브루투스에 관한 건 자주 나오지도 않는데, 카이사르가 죽음의 순간 부르짖었다는 "브루투스 너마저"에 완벽히 부합하는 결과물이 나왔다는 점에서 [브루투스의 심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최고로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한다. 그걸 노리고 지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쨌거나 이로써 히가시노 소설을 한권 더 독파했다. 사놓고 안 읽은 책 땡처리(...)한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집어든 건데, 가볍게 읽기는 했으나 나름대로 생각은 많은 책읽기였다. 근데 어째 나 히가시노 게이고 전작주의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팬은 아니라고 한다는 게 참...-_-; 그러니까 그 2%를 채워 줄 작품이 필요하다구!


  브루투스의 심장 - 완전범죄 살인릴레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세 명의 남자가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장소를 옮기며 살인, 시체운반, 시체처리의 살인계획을 세운다. 이 남자들의 목적은 각자의 욕망이다. 욕망에 방해가 되는 여성을 처리하려 하지만 뜻밖에 살인의 바통은 세 남자 중 한 명에게로 돌아간다. 누가 범인인지 모르는 가운데 살인은 계속되고 욕망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다.
2009/05/17 00:45 2009/05/17 00:45
- 비오는 날은 무조건 집에서 고구마와 만화책을 즐겨야 되는 건데, 지금 우리 집에는 고구마도 없고, 고구마 사서 쪄준다고 한 엄마는 결혼식 갔고, 아빠도 결혼식 갔고, 동생은 거실에 퍼드러져서 TV보느라고 정신없고, 나는 골방에 가서 만화책 뭐 볼까 책장만 열라-_-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많은 만화 중에 볼 게 이렇게 없단 말이야?' 하면서 비분강개하다가 비오는 날 먼지나게 두드려맞다 미친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예쁘게 미친 광년이의 매력에 빠져보고자 '야! 이노마'를 들고 왔다.

나? 광년!

나? 광년!



- 요거트, 그러니까 떠 먹는 요구르트를 받아 먹는다. 유승호가 '누나! 아~'하는 슈퍼100. 유승호가 광고한다고 해서 받아먹는 것은 아니다. 원래는 윌이랑 우유 먹었는데 값이 겁나게 올라서 끊었더니 몇 달 있다가 한국야쿠르트 아줌마가 집으로 찾아와서 "다소씨, 왜 끊었어요. 나 일 그만뒀다가 다시 왔는데 다소씨가 우유 끊어서 섭섭했어. 이거 서비스 줄 테니까 생각해보고 함 먹어봐!" 하면서 슈퍼100을 3개나 주고 가셨다. 그래서 먹어봤는데, 아 맛있는거라. 난 원래 떠먹는 요구르트 중 슈퍼100을 제일 좋아했음. 그래서 슈퍼100 블루베리랑 우유하나 받아먹기로 했다. 슈퍼100은 내 꺼고, 우유는 동생 꺼다. 하루에 하나씩 먹는데 먹다가 안 먹으면 변비 걸릴 것 같다. 쾌변다소를 위해서 맨날 먹어준다.

누나! 아~

이거다. 내가 먹는 거!


- 읽고 싶은 책이 몇 권 있는데, 안 사고 있다. 난 수양 중이다. 사면 안돼. 사면 안돼. 산다고 바로 읽을 것도 아니잖아? 보고 싶으면 도서관 고고씽! 이라지만 그래도 사고 싶은 책은 하루에도 열 두권씩 불어난다. 요즘 사고 싶은 책 중에 하나는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인데, 첫 출간때부터 보관함에 담아놨는데 아직도 안 사고 있다. 근데 최근에 누가 재미있게 읽었다며 리뷰를 남긴 걸 보고 급 땡기고 있는 중이다. 도서관에 검색해봤더니 대출 중이다. 아, 사고 싶다. 그리고 또 사고 싶은 책중에 뭐가 있냐면 <HOW TO READ 라캉>. 요즘 라캉에 관심이 많아져서 라캉 관련 책을 왕창 검색해봤는데, 난해하기 짝이 없는 라캉은 우리나라에 괜찮은 번역서가 드물단다. 그리고 더 아이러니한 건 죄다 라캉 분석 책이고, 정작 라캉이 저술한 책은 별로 없다는 거다. 그나마도 옛날 옛적에 번역한 거고 잘 팔리지도 않아서 오역 수정도 안 된 거. -_-; 슬픈일이다.


-  얼마전에 기/저/귀에서 벌레 나왔다는 뉴스를 밥 먹으면서 봤다. 적나라한 증거사진과 함께. 나 비위 좋은데 토할 뻔 했다. 아기들 엉덩이에 피부염 생긴 거 보여주는데 아오, 승질이 뻗쳐서. 더 무서운 건 생/리/대에서도 나왔다네? 하긴 뭐 옛날에는 바/퀴/벌/레도 나왔고, 심지어 바퀴가 알 깐 것도 나왔다는 뉴스도 있었다만은 그래도 어쨌거나 달마다 그거 사용해야하는 여자 입장에서 이런 뉴스가 소름끼치는 건 당연. 더 놀라운 건 어제 뉴스보니까 그게 '좋/은/느/낌'이었다는 거다. 아놔, 얼마 전에 '좋/은/느/낌' 2만원어치 사다놨는데 이딴 뉴스나 나오고 말이야. 연아 때문에 '위/스/퍼'로 슬슬 갈아타고 있는 중이긴 한데, 세이프티 존 말고 그린은 나랑 별로 안 맞아서 아직은 '좋/은/느/낌'이 필요하단 말이야. 이젠 생/리/대 쓸 때 돋보기로 벌레 있나 없나 검사까지 해야하나여...-_-
2009/05/16 15:47 2009/05/1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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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세
잉게보르크 바하만 지음 / 차경아 옮김
문예출판사




수록 작품

- 삼십세
- 오스트리아 어느 도시에서의 청춘
- 모든 것
- 살인자와 광인의 틈바구니에서
- 고모라를 향한 한 걸음
- 빌더무트라는 이름의 사나이
- 운디네 가다



인생에는 분기점이라고 불릴 만한 나이가 있다. 이를테면 열 살. 최초로 두 자리 숫자의 나이를 갖게 된 그 때, 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난 여전히 하급생이었고,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는 상급생이 되려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10이라는 숫자가 주는 알 수 없는 충족감은 나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스무 살. 마침내 싱그러운 봄 햇살 같은 스무 살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던 그 때. 이제 더 이상 십대의 방종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게 아쉬우면서도 어른의 입구에 서 있다는 사실이 몹시 흥분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만 19세가 아니었으므로 -게다가 난 생일도 엄청 늦었으므로- 술집에서 번번히 퇴짜를 맞아야만 했다. 흥, 그까이꺼 아무것도 아니지. 난 스무 살의 꽃피는 아가씨라구. 그리고 서른. 이 말에 어쩐지 쓸쓸하다는 느낌이 먼저 드는 것은 결코 내 탓이 아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든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같은, 유명 노래와 시 제목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고, 이제 꺾였다고 악의없이 놀리는 동생의 장난 어린 말투 때문이다. 오히려 겁을 먹는 건 사실은 서른이 되어보지도 않은 이십대의 누군가. 계란 한판이라는 우스갯 소리와 처녀와 노처녀의 불분명한 기준을 이십대와 삼십대로 나누는 것도 알고 보면 2에서 3으로 숫자 하나가 바뀔 뿐인 것을.

이렇게 덤덤하게 말해보지만, 아무래도 서른이란 십 단위의 숫자 하나 바뀌었다고 쿨하게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에 대해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세]를 번역한 차경아 씨는 이렇게 말한다.

"제 아무리 논리와 철학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자신도 어느덧 서른 살의 문턱을 넘어선 것을 깨닫게 되는 날, 목구명으로 무턱대고 차오르는 언어의 발효를 막을 수 없는 기분에 곧잘 빠져들게 된다. 그것이 후회이든, 변명이든,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관조이든 개안(開眼)이든 간에 서른 살이라는 에폭(epoch)에 매달려, 무작정 호소하고 싶은 충동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다."

미처 서른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이 몇 줄의 말에서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것 같다. 아직은 서른 살의 문턱에서 기웃거리고 있기에 이렇게 덤덤할 수 있지만, 그 문턱을 넘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순간엔 분명 그런 기분이 될 것 같다. 서른이 무어 그리 대단한 나이냐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스물 일곱이 넘으면 퇴화가 진행된다지 않나. 어쩌면 아주 본능적으로는 그것을 슬퍼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정확히 서른이 되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 책을, 참을성이 부족한 나는 그보다 조금 앞서 읽기로 결정을 하고 어제 저녁 책을 펴들고 말았다.


표제작인 <삼십세>는 '그'의 이야기다.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는 않으리라."하고 시작하는 <삼십세>는 29세 생일이 되는 날 부터 30세에 이르는 일년간의 '그'의 방황과 여행을 그리고 있다. 나는 책을 보는 내내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렸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항하는 콜필드의 짧은 가출과 '그'의 여행은 미묘하게 닮아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콜필드는 자신의 외부와 갈등을 겪었고, '그'는 자신의 내면과 갈등을 겪는다 것 정도. 어쩌면 서른이 된다는 것은 십대 때 찾아오는 열병과도 같은 사춘기의 변형이 아닐까. 그 열병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그것이 지나가면 한층 단단해지는. 여행을 하는 동안 그는 수없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특히 '히드라처럼 증식한다'고 표현하는 '몰'에 대한 간단치 않은 고뇌는 책 밖의 나마저도 깊숙하게 끌고 들어간다. 이야기는 내내 호수의 물결처럼 그 안에서만 일렁이더니 마지막에 예기치 못한 사고를 만나 급물쌀을 타기 시작한다. 해결책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 사고가 그의 의식에 큰 역할을 한 것만은 틀림없다. 모르겠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게 무엇인지.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시작할 계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오히려 갈등을 겪고 있는 '그'를 세차게 뒤흔들어줄 만큼 강렬한 계기. 어쩌면 그거야말로 가장 강력한 갈등의 해결책인지도 모르고. 어쨌든 곧 삼십세가 될 '그'는 이제 삶을 간절히 원하며 독자에게 이러한 문구 하나를 남기고 이야기를 맺는다.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일어서서 걸으라. 그대의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

<오스트리아 어느 도시에서의 청춘>은 전쟁과 폐허속에서 커가는 어린이들의 성장 과정을 굉장히 섬세하게 그린 작품인데, 그 사실적인 묘사가 묘하게 아름다웠다. 전쟁 속 피난어린이들을 보는 아픔보다 그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그 아이들은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이 더 와닿았다.슬프도록 아름다운 아이들, 청춘들. <모든 것>은 한 아버지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그의 의식은 평범한 삶을 거부하는 듯 보이지만, 그의 행동과 주위의 상황은 오히려 흔해빠진 설정으로 흘러간다. 고민을 거듭하며 존재의 의미를 찾지만 결국은 가장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온다. <살인자와 광인의 틈바구니>는 아이러니하다. 살인자가 아니면서 살인자를 자청하는 남자와 의식하지 못한 채 광인으로 비춰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종전 후의 이야기지만 결국은 전쟁 중에 벌어진 사건들이 중심이다. 군대 갔다온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에 심취하듯 전쟁에서 돌아온 남자들은 모든 이야기가 전쟁 중에 있었던 이야기로 통한다. 진리인가보다. <고모라를 향한 한 걸음>은 앞선 <살인자와 광인의 틈바구니>와 함께 가장 극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고모라'라는 성경 속 도시이름이 왜 제목에서 쓰였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사랑이란 남녀사이에만 존재하는가에 대한 발칙한 물음을 던지지만, 명쾌한 결론은 내지 못한다. 아니 낼 수 없을지도. <빌더무트라는 이름의 사나이>는 그 우연함이 마음에 든다. 판사와 살인자의 이름이 같다는 설정에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진실은 과연 옳고 좋은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대해 고뇌한다. 결국은 보다 완전한 진실의 추구를 꿈꾸는 걸까? <운디네 가다>는 마치 희곡 같은 느낌을 준다. 무대 위에서 상연해야 할 것 같은 느낌. 가장 감정의 표현이 풍부하다고 해야할까, 가장 시적이면서 또한 가장 직접적으로 말한다. 여성적 측면에서 무언가에 대해 소리치는 듯한 글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바하만의 문체는 사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순수문학의 그것이라 읽는 내내 어찌나 버벅거렸는지. 이미 클래식의 반열에 든 작품이라 시대도 현재와는 거리가 있거니와 그나마 익숙한 영미문학이 아닌 오스트리아 문학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생소했다. 아니 바하만의 출신이 오스트리아일 뿐, 정확히는 독일문학에 가까운가?; 아무튼 법학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작가라 그런가 짧은 작품 안에도 오만가지 상념이랄까 관념이 듬뿍. 여타 소설 읽듯이 줄줄 읽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읽기는 읽는데 내가 글자를 읽는지, 글자가 나를 읽는지 모를 무념무상의 세계로 빠지게 될 소지가 다분하다. 천천히 한자 한자 음미하며 읽어야 할 책이다. 다시 말해 쉽다거나 즐거운 책은 아니라는 말. 나는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정말로 진정한 삼십세가 되는 날 한번 더 들여다 볼 생각이다. 그 때는 어떤 느낌일지…….


덧,
표지에 그려진 처연하게 아름다운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세 - 문예세계문학선 10  잉게보르크 바하만 지음, 차경아 옮김

독일 전후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이자 철학자인 저자의 산문집. 여성의 통절한 의식의 갈등과 진실에 대한 도전이 심각하고 명료하게 묘사돼 있다.
2009/05/16 13:07 2009/05/16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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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을 느끼는 것은 의외의 순간이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 미묘하게 예전과 다름을 느끼는 것. 노인은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한다. 입으로 부는 화살이 목표물을 빗겨나간 그 날, 노인은 자신이 나이가 들고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은 아마존 밀림 부근의 엘 이딜리오에 산다. 한 때는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모 사크라멘토 에스투피냔 오타발로'라는, 마치 얄리얄리얄라셩 얄라리얄라 같은 주문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의 엄청난 이름을 가진 부인도 있었고, 또 한 때는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수아르족에 섞여들어 밀림생활도 했었지만 어쨌든 지금의 그는 혼자다. 그런 그의 '낙樂'이라면 그것은 바로 연애소설을 읽는 일일 텐데, 고즈넉한 그의 오두막에서 한자 한자 음미하며 읽는 연애소설이란 그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다.

노인의 지난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으니 접어두자. 어느날 그는 자신이 쓸 줄은 모르지만 읽을 줄은 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의 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 할 만큼 대단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책 속 표현을 빌리자면- 늙음이라는 무서운 독에 대항하는 해독제였으니까. 그러나 읽을 것이 없었던 그가 낙담해 있을 때쯤 한 달에 두 번 찾아오는 치과의사 루비쿤도 로아차민을 만나고, 그로부터 책을 읽을 수 있게 도움을 받는다.

노인이 자신이 읽을 만한, 마음에 드는 분야의 책을 고르는 데는 무려 다섯 달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는데 그 과정이 사뭇 흥미롭다. 처음 읽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권유가 아니라 한 권씩, 한 권씩 자신에게 맞는 책을 고르는 그의 소신있는 행동이, 그리고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반짝반짝 진지할 것 같은 그의 눈이 떠올라 괜히 입가에 웃음이 맴돈다. 의식을 치르듯 정갈하게, 주문을 외우듯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문장 하나하나마다 골똘히 생각하는 그의 책 읽기에는 진중함이 스며있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라는 어쩐지 서로 겉도는 단어조합이 호기심을 잔뜩 부추겼지만, 내 예상과 달리 노년에 연애소설을 읽으며 우아하게 여생을 보내는 로망스그레이의 삶을 조명한 것은 아니었다. 책 뒤표지에는 '환경 소설'이라는 문구가 써 있는데, 이 말 자체는 너무 상투적이라 재미가 없지만 그래도 내용에는 썩 잘 어울리는 게, 이 책에는 가보지 못한 아마존 밀림의 부족생활과 개발이란 명목하에 서구에 착취당하고 유린당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풍경이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고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뺄건 빼고 정밀묘사가 필요한 건 감정까지 세세하게. 총 200페이지도 안 될 정도로 짧은 분량인데, 그 안에 인물의 특성을 비롯하여 주변 환경과 정황들이 초고밀도 압축처리 되어 있어서 한 사람의 일생을 다 들여다 본 기분이 되고만다. 놀라울 따름.

그 다큐멘터리 같은 묘사 중에 가장 좋았던 건, 노인이 책을 구하러 엘 도라도로 나가기 위해 숲에 잠복(...)해서 원숭이 잡고, 앵무새 잡아서 앵무새 2마리로 배삯 흥정하는 수완까지 선보인 에피소드. 얼마전까지 방영하던 CF 중에 비가 카메라 들고 나와서 '72시간의 기다림.  마침내 나를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가 떠오르는 에피소드였다.(워낙 그 CF를 좋아했었다) 그 밖에 X뱀 에피소드도 은근 기억에 남는데, 그래도 가장 압권은 역시 살쾡이와의 한판 대결이다. 이 부분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가 나이가 들었음을 느끼는 순간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조그마한 일에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때. 사춘기 이후로 딱딱해진(?) 감수성이 나이가 듦에 따라 (누군가는 주책이라고 말할 정도로) 풍부해져서 어떤 때는 감당이 안 된다. 하여간 지난 날의 한 부분을 회상하며 마치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듯 중얼중얼 말하는 노인의 독백 부분이 굉장히 인상 깊었고, 암살쾡이와의 결판 후, 그가 느낀 감정의 동요들이 무척 맘 아프고 가깝게 와 닿았다. 정복자와 같은 모습이지만 원주민 생활을 한 노인이 느끼는 무력감, 그러나 짊어지고 가야할 딜레마, 그렇지만 공생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도 있기에 맘이 아프긴 해도 슬프지는 않았다. 문장도 어찌나 좋던지... 감정과잉이 될 법도 한 부분에서도 끝까지 담백해서 오히려 마음이 쌉싸름해지는 문장들 때문에 괜히 더 눈물이 났다. 엉엉. 결국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소설은 노인에게는 소중한 일과였고, 친구였고,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안식처요 마음의 평화였다. 연애소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어깨가 더는 무겁지 않기를.

내용상 대놓고 비판적이거나 교훈 일변도로 갈 수도 있었을 책인데, 그러지 않아서 좋았다. 이런 은근함이 오히려 효과는 더 큰 법이고, 오래오래 영향을 주는 법이지. 쉬이 잊혀지지 않을 테니까. 노인은 일 년에 두 번 치과의사가 가져다 주는 연애소설을 다리가 긴 탁자 위에 올려놓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다고 했는데, 나는 어쩌면 이 소설을 앞으로 읽고 또 읽을지 모르겠다. 또박또박. 한 때 다른 분야에 비해 유독 소설을 너무 많이 읽는 나의 독서편력이 어쩐지 부끄럽고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일부러 소설을 멀리하던 때가 있었다. 근데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노인을 보면 말이다. 결국은 좋아하니까. 날 즐겁게 하니까. 편안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니까. 그러니까 사실은 이유 따위 필요없는 것이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 Mr. Know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칠레출신의 작가 세풀베다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준 1989년작 장편소설. 살해당한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책을 바친다는 서문에서 짐작되듯, 소설은 아마존 밀림을 배경으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 자연의 무서움과 거대함을 배치해 보여주는 수작이다.
2009/05/15 21:24 2009/05/15 21:24
- 세상은 참  '헐~~~~~'스러운 일이 많다. 최근의 그의 행보에 대해 그간 묻혀진(혹은 묻어둔) 사생활 문제까지 언급하며 욕설을 내뱉고 일각에서는 변절자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모양인데, 늘 그렇듯 너무 과열된다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스러운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정치성향이 다 같을 수 없고, 성향 다르다고 다 싫다거나 누가 옳고 그른지 내 잣대로 모두에게 들이댈 순 없겠지만,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그간 누구보다 기존 보수에서 먼 작가 아니었나?(하긴 M/B가 중도라는데 뭘;;; 그러니 누구 말마따나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중도였으니 제 갈길 가는 거라고 하는 거겠지.) 작금의 상황이 되고보니 나 의원 지지한다고 해서 욕먹은 박 작가님은 애교 수준이고, 김 작가는 처음부터 나 마초요, 나 보수요 하는 분위기를 강력히 뿜어주시며 작품 활동해서인지 차라리 뚝심있어서 멋있게 느껴질 정도. 물론 이번 일 하나로 이 작가 정도로 싫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 허탈하고 허무한 건 어쩔 수 없다. 도대체 2년도 채 안 되는 그 짧은 기간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조가 보였다는 사람도 있긴 하더라만, 아오, 진짜 기분 참 그렇네. 그의 삼/국/지를 읽으면서 좋았던 건, 그가 말하길, 요즘은 조조가 높이 평가되는 분위기도 있지만 자신은 민중의 보편적인 염원을 따르는 원전의 분위기가 좋다며 패권주의적인 현대적 해석과 달리 원전 방향대로 번역했다는 말에 은근 감동했는데... 헐, 이건 정말 너무 충격적인 반전이야. 언론 불신이 강해서 아직은 다 믿을 수 없으니 뭔가 판단을 내리기엔 이르다 싶지만 그래도 아... 씁쓸하다.


5/15 한겨레 기사 전문 보면서 어느 순간 마음이 놓이는 듯 했는데, 끝까지 읽고 나니 어째 더 불안하네. 일단 몽/코 연합 어쩌구 이것부터 조심스러운 것이 아무리 봐도 민족주의적으로 풀고 있는 거 같은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이건 뭐 내가 무식해서 그렇다고 자료 찾아볼래도 별로 건질 만한 것도 없고. 물밑에서 진행해야하는 게 뻥 터져서 자신도 당황했다고 하는데, 결국 뻥 터뜨린 게 본인이라 별로 신뢰도 안 가-_-; 립서비스 지나쳤다, 일부분 경솔하게 행동했다 하는데... 이제와서 그렇게 말하기엔 사실 발언이 좀 강하긴 했지. 문인이라서 더! 단어 하나하나마다 고르고 골라서 했을 거라는 생각에 받아들이기에 더 충격적이었던 거다. 그나저나 난 저 연합 구성에 관한 자료를 난 좀 보고 싶은데 말이지. 궁금해라.
2009/05/15 01:50 2009/05/15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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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만 3년을 묻어둔 작품. [러시 라이프]부터 시작해서 [사신 치바], [종말의 바보] 등 한창 이사카 고타로 작품들을 섭렵하던 때에 함께 구매했던 책. 그렇지만 어느 순간 관심이 시들해져서 결국은 읽지 못하고 던져놓았는데, 지난해 [골든 슬럼버]를 읽으면서 다시금 이사카 고타로에 대한 애정이랄까 관심이 샘솟더니 결국 읽기는 하는구나. 역시 좋다, 이사카 고타로는. 그리고 여전하다. 아니 이건 나름 초기작이니 이 경우에는 옛날부터 이랬었군, 이라고 해야하나? 어쨌거나 변하지 않은 건 그의 작품은 늘 무거운 주제를 그야말로 쿨하게(그러나 가볍지 않게) 말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중력 삐에로]에서는 대놓고

"정말로 심각한 것은 밝게 전해야 하는 거야."

라고 대사를 툭 던지니, 이 책은 어쩌면 작가의 작품철학을 대표하고 있을지도.

재미있다. 그리고 여전히 특색있다. 쓸데없이 미사여구를 수식하지 않는 짧은 문장들이 더없이 개성적으로 느껴진다. 무거운 내용인데도 무지하게 산뜻하게 그려내는 - 그래서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 그의 그런 쿨함이 한때는 오히려 거부감이 들어서 잠시 멀리 하기도 했었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반하고 만다. 물론 다소 멋부리는 듯한 대사나 문장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학적이거나 낯뜨겁지 않은 것은 역시 그이기 때문이다. 매력있다니까. 괜히 그에게 자칭 골수팬이니 열혈팬이 있는 게 아니다.

소재 면에서 중력 삐에로는 다분히 충격적이었다. 여자로서는 정말이지 감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 초반에는 그 설정이 얼마나 께름칙했던지. 하지만 작가는 비탄에 빠지거나 슬픔에 허우적 거리는 것은 과감히 축소·배제한 채,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적절한 미스터리 속에는 '인간이란, 유전자(본성)에 의해 결정되는가? 환경(양육)에 의해 결정되는가?' 하는 아주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이 담겨 있다. 사는 동안에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 문제에 대해서 책을 읽는 내내 끊임없이 해답을 생각하고, 마음을 졸인다. 그러나 '운명이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같은 질문처럼 이런 물음이란 아무리 철학적으로 파고들어도 고정된 답이 없다. 그저 자신이 정한 원칙을 믿고, 그 믿음을 충실이 따를 뿐. 그리고 작가는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중력이 없는 순간의 자유로움을 잠시나마 선사한다. 마치 선물이라는 듯.

상쾌했다. 태생적인 아픔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더라도, 악의 근원을 처치했다는 기쁨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비록 아주 현실적인 면에서 '방법적 옳고 그름'과 '형벌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해도 어쨌거나 이즈미와 하루는 꼿꼿하게 일어서서 맞섰다. 승리했다. 아, 이 통쾌함이라니. 그리고 최고의 멋쟁이 아버지.

늘 생각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혼 가정의 자녀들을 힘들게 하는 건 부모가 이혼했다는 직접적 사실보다 주위에서 이혼 사실을 두고 왈가왈부하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책의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결국 하루라는 존재를 형성한 것은 유전자니 환경이니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출생의 비밀에 대한 주위의(사회적) 시선이었을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즈미와 하루를 앞에 두고 "너희는 형제야!"라고 못 박듯이 한 말이 이즈미를, 그리고 하루를 구원하면서 그들은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아버지는 Triumph. 승리다.

문득 텀을 두고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을 읽은 게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창 그의 작품을 탐독하던 때를 떠올려 보면 이 소설은 그 때 읽었던 작품들과 달리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는 책을 읽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만큼 겉으로야 익살과 유쾌함으로 포장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작가에 따라서는 사회파 소설이 될 법도 한 무거운 내용이다. 그러니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야기가 숨긴 메시지다. 중력 삐에로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덧,
1. 양억관 씨 번역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일단 작품 자체로만 두고 봤을 때 오역 여부를 떠나서 번역체가 별로 안 느껴지기 때문에 매끄럽게 읽을 수 있어 나름 좋아하는 편인데, 가끔 신경쓰이는 것이 단어선택이 좀 옛스럽달까. 일례로 이 분은 '자네'란 말을 너무 좋아하신다.;;;; '자네'라는 호칭은 주로 나이나 직위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그것도 그 말을 쓰는 사람이 나이가 좀 많거나 아니면 둘 사이에 차이가 어느 정도 나야 쓰는- 말인데, 젊은 남녀의 대화에서도 자네라는 호칭을 쓰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이 책 말고도 예전에 [용의자 X의 헌신]을 읽을 때도 그렇고 (찾아보면 더 있을 듯).... 아마 君(きみ)를 그렇게 번역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차라리 '당신'이나 '너'가 더 어울리는 대화에서도 자네를 써버리니 갑자기 주인공들의 나이가 화악- 들게 느껴져 은근히 거슬리기까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녀사이에는 머리 희끗할 정도로 지긋하지 않은 이상 '자네'라는 호칭은 잘 안 쓴다구;;;

2. 그러나 역자 후기는 참 좋았다. 길고 성의있는 역자 후기 난 참 좋더라.

3. 으음, 이사카 고타로 책들이 다시 땡기는 걸. 최근작이 뭐가 있더라~


  중력 삐에로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러시 라이프>의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2003년 작. 끈끈한 가족애로 충만한 가족소설인 동시에, 퍼즐을 풀어가는 듯한 독특한 구성이 돋보이는 청춘소설이다. 지적인 익살과 절묘한 구성, 의표를 찌르는 반전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2003년 제129회 나오키 상 후보작에 올랐다.
2009/05/14 20:49 2009/05/14 20:49